"대일(對日) 원폭투하 불필요했었다"

1995. 2. 21. 10:2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원폭사용 없었어도 일본 항복했을것

희생 막기위한 대안모색 건의는 묵살당해

(서울=연합(聯合))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지 않고도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고 미국의 한 역사학자가 주장했다.

스탠포드대학의 바튼 번스타인 교수는 `포린 어페어즈'誌에 기고한 "재고(再考)된 원폭" 제하의 글에서 원폭투하 3개월 전인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이미 궤멸되었고 소련이 연합군에 가담했으며 일본 본토에 대한 대규모 공습 등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그해 11월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원폭 사용을 결정한 막바지 단계에서 민간인 희생을 막기위한 대안(代案)을 모색해 봐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됐으나 독전(督戰)무드에 밀려 채택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번스타인 교수는 또 `맨해턴 프로젝트'로 명명된 20억 달러의 원폭개발 계획이 의회와 대부분의 각료들도 모른채 은밀히 추진됨으로써 원폭을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예산낭비에 대한 혹독한 비판에 대한 우려감이 대안모색 노력을 희석시킨 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또 일부에서는 1945년 11월 1일로 예정된 미군의 일본 상륙으로 발생할 약 50만의 미군생명을 구하기 위해 원폭이 필요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미국인 생명을 위해 일본인은 희생시켜도 좋다는 논거가 설득력을 잃고 있을뿐만 아니라 원폭사용에도 불구하고 미군 희생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번스타인 교수는 이어 소련의 참전과 관련,종전 후 對蘇 우위확보 전략도 원폭사용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그의 논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50년 전 1945년 8월 중 3일간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확인된 사망자 11만 5천,추정 사망자 25만,부상자 10만명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원폭투하의 이유와 방법에 대해서는 윤리적, 역사적 의문이 제기되었다.왜 그처럼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내면서 도시를 목표물로 삼았는가,그러한 방법 말고는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대안이 없었던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은 그러나 한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그것은 당시 정책 결정자들이 원폭투하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당시 원폭개발은 독일과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만약 미국의 원폭이 조금만 더 일찍 완성되었다면 독일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바지 단계에서 투하대상은 독일에서 일본으로 변경되었다.그리고 원폭 투하 전에도 도시의 민간인들이 군사 목표물이 이미 돼 있었다.미국은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독일 내 비전투 인원을 공습대상으로 삼았고 1945년에 와서는 일본에 대한 공습에서도 민간일을 목표물에 포함시켰다.

민간인에 대한 대량 공습은 전쟁중이라 할지라도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해 도시 폭격은 피하라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전(戰前)호소는 공염불이 되었다.결국 1945년까지 미국 지도층은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를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 않았다.문서보관소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미국 지도자들이 적절한 대안을 찾았던들 원폭투하 및 연합군의 일본 상륙 없이도 전쟁은 그해 11월까지 끝낼 수 있었다.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민자와 과학자들의 권유에 따라 `맨해탄 프로젝트'라는 암호명으로 원폭개발 걔획을 시작했다.이 계획은 미국과 히틀러의 독일 중 누가 먼저 원폭을 개발하느냐 하는 처절한 경쟁으로 시작되었다.당시 루스벨트와 참모들은 원폭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무기라고 생각했다.이들은 또한 소련이 이미 연합군의 동맹이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에 협상 카드로 쓰기위해 원폭계획을 소련에는 비밀로 했다.

1944년 중반 전쟁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다.독일과의 전쟁이 원폭이 완성되기 전인 1944년 봄 쯤이면 끝날 것이 확실시됨에 따라 루스벨트와 참모들은 일본이 어차피 목표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944년 9월 루스벨트와 영국수상 처칠은 하이드 파크 메모를 통해 극비리에 원폭투하 대상국을 독일에서 일본으로 바꾸는 작전계획에 서명했다.

이들은 메모에서 원폭사용에 관한 약간의 의문을 표시하는 문귀를 남겼다."일본에 대한 원폭사용은 충분한 검토 끝에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는 대목이 그것이다.4일 뒤 루스벨트는 방미중인 영국 외교관과 미국 과학자 배니버 부시와의 토론을 통해 원폭을 일본에 실제로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일본인을 참관시킨 가운데 미국에서 원폭을 전시케하여 위협용으로 쓸 것인지를 잠깐동안 궁리했다.이러한 생각은 그러나 원폭 개발 목표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기 대문에 부시는 루스벨트의 `재고'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알고 회의자료에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을 잊어버렸다.하루 뒤에야 이를 기억해낸 부시는 다른 메모에 이를 첨가했다.

원폭사용에 대한 루스벨트의 `재고'언급은 4년간 두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지나가는 말"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원폭사용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있던 당시의 분위기에 밀려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전쟁무기로서의 원폭의 합법성은 맨해탄 프로젝트 국장이었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 공군당국에 대해 원폭투하를 담당할 특별반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행정절차 형식으로 정당화되었다.

20억 달러가 투입된 맨해탄 프로젝트는 대부분의 각료와 거의 모든 의원들에게 비밀로 붙여졌다.당시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트루먼도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1945년 4월 12일 갑자기 태통령이 된 뒤에야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루스벨트의 일급 참모였던 제임스 번스는 1945년 초 루스벨트에게 맨해탄 프로젝트의 무용성을 경고했다.그는 만일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 가차없는 비판의 대상이 될 것임을 경고했지만 독전무드에 휩쌓여 빛을 보지 못했다.하물며 졸지에 대통령이 된 트루먼으로서는 이 계획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무리였다.

그로브스 국장은 1945년 봄 원폭의 목표물을 선정하는 계획에 대해 조지 마샬 참모총장의 승인을 받았다.4월 27일 목표선정위원회가 구성되고 토꾜,요꼬하마,나고야,오사카,교토,고베,야와타,나가사키 등이 물망에 올랐다.

목표선정 작업에 관련된 인사들은 군사목표만 떼리느냐 민간목표도 포함시키느냐를 두고 여러차례 격론 끝에 신 무기를 "테러무기"로 쓰기로 최종 결론,마지막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선정했다.히로시마는 군사기지가 있다는 이유로 선정됐지만 나가사키의 선정 배경은 석연치 않다.

원폭투하가 있은 지 수일 후 트루먼은 기독교전국회의에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일본인들의 진주만 기습과 미군포로 학살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그들(일본)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는 폭격밖에 없었다.야수를 상대할 때는 야수로서 대할 수 밖에 없었다." (특별취재본부)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