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시네다이어리] 맹목적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감옥으로 만든다

2015. 11. 1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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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스파이 브릿지'

[편집자 주]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시네 다이어리>는 국내에서 상영되는, 그러나 작고 예술적이라는 이유로 자칫 사라지기 쉬운 영화들에 대한 기록을 위한 것이다. 국내 영화계의 배급,유통 구조가 개선되면 이 다이어리는 작성을 멈출 것이다. 빨리 작성이 중단되기를 바라는 이상한 영화 일기장.

'스파이 브릿지' 영상 캡처

코엔 형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을 한데다 비교적 흥행 보증수표로 불리는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개봉 일주 동안 20만 관객을 채 모으지 못했지만 <스파이 브릿지>는 할리우드 영화가 얼마나 기본기에 충실한 지, 이른바 웰 메이드 영화의 정수란 무엇인지, 그런 것 다 떠나서 영화란 것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올바른 시선을 투입하려고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적어도 이 영화에는 ‘정확한 역사관’ 따위의 정치적 수사(修辭)는 보이지 않는다. 역사야 말로 가해자와 피해자,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 권력자와 피억압자 사이에서 얼마 만큼의 균형잡힌 시선과 다양한 시점을 지녀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때문에 <스파이 브릿지>만큼 작금의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던지는 영화는 없다. 그래서일까. 옳은 자는 늘 뒤늦게 인정받는다고, 흥행이 더디다. 물론 그걸 슬퍼할 이유는 없다. 진주 목걸이는 언젠가 제 주인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파이 브릿지' 영상 캡처

영화에서 거론되는 ‘스파이 브릿지’는 분단 독일의 옛 국경지역이었던 포츠담의 글리에니케 다리를 가리킨다. 이 다리 역시 현재 통일 독일의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지만 20년 전만해도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분단의 장소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후 국경선이 사실상 무너져 내리기 전까지 이 다리의 동쪽과 서쪽 끝에는 검문소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1962년부터 1982년까지 미국과 옛 소련 간의 대규모 스파이 교환이 이뤄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영화 <스파이 브릿지>는 이 글리에니케 다리에서 벌어졌던 대표적인 스파이 교환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래서 언뜻 생각하기에는 이 영화가 냉전시대의 얘기를 하고 있으며 스필버그의 나이를 생각할 때(?) 애국심이니 자본주의적 체제의 우월성 등등을 거론하며 보수적이면서도 新냉전적인 이데올로기를 설파할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그건 철저한 오산이다. 영화는 그와 반대로 좌우 편견의 이데올로기 모두, 특히 맹목적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금의 세상을 얼마나 숨막히는 감옥으로 만들고 있는 지를 강조한다.

'스파이 브릿지' 영상 캡처

할리우드 영화의 위대함이란 종종 이런 데서 느껴지는데, ‘보편적 공정성’을 구축하는 데 있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신념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신념의 공정성을 지키는 일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특히 지금의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강렬하다.

한국사회에서 현재 진실로 중요한 것은 특정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역사관과의 싸움보다는 정치사회적 편견과의 투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념의 공정성’에서 그 ‘공정성’의 잣대와 기준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되돌아 올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조차 변증법처럼 끊임없이 새로 변형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만 계기적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진화한다는 점 만큼은 불변이다. 마치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 진실은 없다는 것이다’라는 논법의 확장된 이치와 같다.

'스파이 브릿지' 영상 캡처

이 영화가 갖는 컨텍스트(context)적 깊이가 남다르다는 것은 나중으로 돌릴 얘기다. <스파이 브릿지>는 텍스트(text)만으로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해서 볼 만한 작품이다. 이른바 뛰어난 영화란, 오프닝에서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지,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이 어떤 캐릭터들을 지녔는지를 한번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도노반(톰 행크스)이 등장하는 앞 부분 신(scene)이 그렇다. 첫 신의 공간은 제목에서 연상되듯 법정이나 CIA 국장의 집무실 같은 곳이 아니다. 예상치 못하게도 호텔 라운지 쯤으로 보이는 곳에서 도노반은 상대 남자와 설전을 벌이며 자신을 등장시킨다. 두 사람 사이에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보니 주인공 도노반은 보험회사를 변호하는 입장이다. 두 남자는 이미 꽤 오랜 시간 전부터 최근에 발생했던 교통사고에 따른 피해 보상금을 협상 중이다. 상대방 남자는 5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으니 다섯 명 모두에게 개별적인 보상금이 책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노반은 차분하지만 비교적 강경한 어조로 그를 응대해 나간다. 개별적인 협상은 불가하다며 당신이 말하는 식으로 매번 보험금을 지급하다 보면 재난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보상하게 됨으로써 국가가 붕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을 맺지 못하지만 결과는 일괄 보상금 지급을 내세운 도노반 측이 승소했음을 암시한다. 스파이와 첩보전을 다루는 영화에서 이 장면은 다소 황망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코엔과 스필버그가 다소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을 도입부에 굳이 왜 썼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도노반은 이후 글리에니케 다리에서 스파이 교환을 협상하면서 소련 측 스파이인 아벨(마크 라일런스)을 넘겨주는 대신 소련 영공에서 격추돼 포로로 잡힌 미국 첩보기 조종사와 동독에 억류돼 있는 예일대 경제학과 유학생의 교환을 동시에 성사시킨다. 일괄협상이다. 이야기의 앞뒤가 이렇게 착착 들어맞을 때 관객들의 영화에 대한 정서적 동일화는 증대된다. 스필버그가 연출의 장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대목이다.

'스파이 브릿지' 영화 포스터

스필버그의 연출, 코엔의 시나리오와 함께 톰 행크스와 마크 라일런스의 연기 앙상블도 명불허전이다. 미국의 반공사상이 극에 달해 있던 1957년에 적국 스파이와 그를 변호하는 미국 내 변호사가 진심으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은 실로 암시하는 바가 크다. 세상의 평화는 각각의 이념적 위치에서 상대의 이념적 사고를 인정하는 구체적 교감을 통해 한 켠 한 켠 쌓아져 나가는 것임을 웅변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지금과 같은 이념적 극단의 시대에 가족과 국가, 체제와 이데올로기 문제가 실생활에서 어떤 방식으로 교감돼야만 세상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지를 갈파한다. 그 기초는 다름 아닌 ‘상식적 사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스파이 브릿지' 영상 캡처

도노반과 아벨은 당시의 미국 사회가 보여준 극도의 편견과 그에 따른 위협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도노반은 아벨에게 말한다. “당신은 도통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군요.” 아벨이 말한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게 있소?” 자신에게 내려질 사형 언도를 어떻게든 면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변호사 도노반을 향해 아벨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를 담아 이렇게 얘기한다. “부디 조심하시오.(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과 당신 가족을 위해)” 상대에 대한 배려와 희생이 없는 한 사람 간의 우정은 구축되지 않는다. 그건 이념의 양 진영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논리이며 체제가 다른 국가 간 협상에서도 똑 같은 울림을 전하게 되는 얘기이다.

<스파이 브릿지>는 1953년 로젠버그 부부 사건의 전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전기 공학자이자 엘리트였던 이들 부부는 결국 소련 측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 로젠버그 부부가 사형까지 받았어야 했느냐를 두고는 반 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이어진다.

역사 책이라면 로젠버그 부부를 스파이로 기술하는 쪽과 지식인적 양심에 따른 행동이었다라고 기술하는 쪽 모두를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각각의 시선을 담은 교과서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스파이 브릿지>는 역사란 다양한 시선의 집합적 서술임을 우회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오동진

yun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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