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오늘도 외친다, 행복할 자유를 달라고

이석원 여행작가 2014. 8. 3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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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과 예술과 패션의 도시. 1년 365일 사람의 발길이 닫는 곳마다 특별한 사랑의 사연이 흐르고, 한 번쯤 파리지앵이 되기 위해 멋진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샹젤리제 거리며 포부르 생 토노레 거리나 생 제르망 데 프레 거리를 돌아다니는 꿈을 꾸게 하는 곳. 거리의 멋진 의상실 오트쿠튀르(haute-couture)나 눈과 코와 입이 함께 행복해지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비스트로(bistrot)며 노천카페의 진한 커피향이 발걸음을 붙잡는 곳. 파리(Paris)다.

◇ 파리에만 가면 사람들은 자유를 만끽한다. 특히 젊은 남녀들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든 좀 더 과감해지고, 보다 솔직해진다.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지고, 이성보다는 감성에 충실한 분능으로 모든 것을 누린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추하고 민망하다기 보다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파리는 낭만과 사랑의 도시, 솔직한 감성이 정결한 이성을 지배하는 도시라고 부르는 지도 모른다. ⓒ이석원

그러나 사실 파리는 세상 그 어느 멋진 도시보다도 더 파란만장한 역사의 흔적들이 배어 있다. 찬란한 궁정 문화와 귀족 문화로 사치가 극에 달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피폐해진 국민들의 분노로 대혁명이 일어나기도 했고, 혁명의 시대 참혹한 피의 보복 위에 민주주의와 앙시앙레짐이 반복할수록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곳이 파리이기도 하다.

특히 1871년 파리 코뮌으로 최소 2만 명이 학살을 당한 후 자그마치 100년 동안 행정구역으로써의 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도 했던 것은 파리에 대해 지극히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고 지나가는 일. 즉 지구상 그 어느 지도에도, 그 어느 행정명에도 파리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까지 거치면서도 파리는 세계 문화의 중심이고, 사랑하는 이들의 성지였다.

◇ 곧게 곧게 뻗어나간 파리의 거리는 이미 160여년 전 정리된 것이다.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 꼭대기에서 본 샹제리제 거리. ⓒ이석원
◇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에서 내려다본 파리는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하지만 파리의 정서가 그렇듯 그것은 부끄럽거나 민망한 것이 아니고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은밀함이다. 멀리 최첨단 상업지구인 라 데팡스의 마천루가 보인다. 신개선문도 보인다. ⓒ이석원

그래서 파리 여행은 멋과 낭만을 따라가는 감각의 여행이면서 동시에 문화와 예술을 쫓아가는 감성의 여행이자 역사의 꼬리 밟기를 하는 이성의 여행이기도 하다. 그 중 어느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또 그 모든 것을 다 취할 수도 있다.

파리의 넓이는 서울의 6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실 파리에서 유명한 것들은 장구한 역사의 산물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파리는 1840년대 후반 나폴레옹 3세 때 파리 시장 오스만 남작에 의해 대대적인 도시 정비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훨씬 더 유구한 역사의 흔적들이 파리에 남아 있었지만, 1789년 대혁명 이후 60년 넘게 이어진 혁명의 시대 그 숱한 데모가 지겨웠던 오스만 시장은 데모에 용이한 골목들을 다 부수고, 오래된 건물과 시설들을 현대화하면서 도시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런 파리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에투알 광장에 있는 개선문(Arc de triomphe)이다. 지금은 '샤를 드골 광장'이라고도 불리는 에투알 광장은 그곳에 개선문이 세워지고 12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기점이 되면서 명실공히 파리의 중심이 됐다. 위풍당당 개선문은 그 흔한 나폴레옹의 흔적 중 하나다. 나폴레옹이 1805년 프로이센과 싸워서 이긴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로마의 개선문을 본떠 세우기 시작한 것인데, 공사는 1806년에 시작했지만 1836년에 완성됐다.

◇ 파리에는 3개의 개선문이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완공이 된 카루젤 개선문. 루브르 궁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석원
◇ 에펠탑과 함께 파리의 상징이 된 개선문. 다른 2개의 개선문과 구분하기 위해 에투알 개선문이라고도 불린다. 가장 오랜 시간동안 건설됐고, 파리를 찾는 여행자들의 필수 방문지로 각인돼 있다. ⓒ이석원
◇ 1989년부터 라 데팡스의 입구를 지키기 시작한 신개선문. 불어로 그랑드 아르슈라고 불린다. 규모로는 에투알의 개선문보다 2배 이상 크고 제작비용으로만 우리 돈 3500억원이 들었다. ⓒ이석원

나폴레옹은 1821년에 대서양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둬 완성된 개선문을 보지 못했지만, 유해는 1840년에 개선문 아래를 지나 파리로 돌아와 앵발리드(Invalides)에 매장되었다. 빅토르 위고의 시신도 이곳을 지나갔고, 1944년 8월에는 드골은 이곳에서 파리 해방을 선언했다. 높이 50m의 꼭대기에 오르면 사방으로 파리 시내가 완전히 조망된다.

파리에는 모두 3개의 개선문이 있다. 에투알 개선문에서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 카루젤 개선문(L'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이 있고, 동쪽으로 가면 최첨단 상업지구인 라 데팡스(La Defense) 입구를 지키는 신개선문(Grand Arche)이 있다. 이들 3개의 개선문은 완전한 일직선상에 있어 파리 시내를 횡으로 지탱하는 셈이다.

이중 카루젤 개선문은 에투알 개선문과 거의 같은 시기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기도 작고, 공사가 신속히 이뤄진 탓에 나폴레옹 집권기인 1808년 완성됐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인 카루젤 개선문 또한 약탈 문화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훔쳐온 '검투사 조각상'을 카루젤 개선문의 장식품으로 삼았다.

◇ 12개 방사형으로 뻗은 에투알 광장의 한복판에 우뚝 선 개선문. 단순히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구조물의 수준을 넘어서 부조된 조형물이나 새겨진 글씨 등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나폴레옹은 이 개선문에 온 정성을 쏟았지만 결국 살아 생전 보지 못하고 죽은 후에 이 개선문의 밑을 지날 수 밖에 없었다. ⓒ이석원

신개선문은 그로부터 거의 200여년이 지난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그 규모를 보면 전 세계 도처에 있는 다양한 아치형 개선문 중 단연 으뜸이다. '인류의 영광을 위한 새로운 개선문'이라는 모토로 만들어졌는데 덴마크의 건축가 스프레켈슨이 디자인 했다. 높이만 110m, 건축비가 우리 돈으로 무려 3500억 원이 들었다.

파리를 가장 파리답게 만드는 것은 단연 샹젤리제 거리(Avenue Champs Elysees)다. 원래는 '태양왕' 루이 14세 때 베르사유 궁전 조경을 담당했던 르 노르트가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부터 파리를 관통해 루브르 궁전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만든 것이었는데, 지금은 에투알 광장에서 콩코르드 광장에 이르는 1.8km의 구간을 이르는 지명으로 범위가 줄어들었다.

◇ 샹제리제 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로'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온갖 비싸고 화려한 패션의 거리면서 동시에 전세계 젊은이들이 반드시 걷고 싶은 거리다. 이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고, 그래서 파리를 찾는 여행자라면 기꺼이 이 길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매년 7월 14일을 즈음한 시기 혁명기념일과 크리스마스 시즌에 샹제리제를 찾는 사람은 다른 때 이곳을 찾는 사람에 비해 최소 10배의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이석원

길 양 옆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 명품 브랜드의 본사와 파리 매장이 늘어서 있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비싼, 그리고 가장 화려한 식당들과 카페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파리지앵이 될 수 있으며, 세계 최고의 멋쟁이가 된 착각에 빠질 수 있는 마법의 길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얘기하고 칭송하는 이 길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인도와 차도의 네모난 작은 돌길 틈새에 빼곡히 박혀 있는 것은 담배꽁초다. 그 아름다운 노천카페에 앉아서 진한 에스프레소나 카푸치노를 마시는 멋진 남녀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가 무색하리만큼 바닥에 담배꽁초를 버려댄다. 그리고 그들은 항변한다. 공공근로를 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으로 가는 샹제리제 거리 오른쪽에 위치한 루이비통 본사 매장. 이곳은 1년 365일 한국과 중국의 여행자들로 붐빈다. 거의 사재기 수준으로 열광하는 탓에 루이비통 측은 몇해전부터 외국 여행자에 한해 여권 1개당 제품 1개 판매 정책을 편다. 살짝 부끄럽기도 하지만 "누구 덕에 먹고 사는데..."라는 반감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덕에 파리의 한국이나 중국 유학생 중에는 루이비통 대리구매 아르바이트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석원

뿐만 아니다. 샹젤리제 거리는 도로 폭이 70m에 이르는 대로지만, 그리고 곳곳에 신호등이 달린 횡단보도가 있지만 신호등을 지키는 사람도, 더구나 횡단보도를 이용해 도로를 건너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한국이나 일본에서 온 여행객들이나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면 횡단보도에 서 있지 정작 파리 시민들은 무단 횡단이 예사다. 멋쟁이 파리지앵들의 전혀 예기치 않은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에투알 광장에서 콩코르드 광장에 이르는 구간은 번화한 상점과 은행 등이 즐비한 번화가다. 하지만 콩코르드 광장(La Place de la Concorde)에서부터 튈르리 공원(Jardin des Tuileries)을 거쳐 루브르 궁전에 이르는 구간은 힐링의 공간이다.

콩코르드 광장은 루이 15세 때인 17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5살에 루이 14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루이 15세는 동서로 360m, 남북으로 210m에 이르는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을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기마상을 세워 '루이 15세 광장'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대혁명 때 군중들에 의해 기마상이 파괴되고 나서는 '혁명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개선문과 루브르 박물관 중간에 위치한 콩코르드 광장. 지금은 파리 시민은 물론 여행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휴식의 공간이지만 220년 전 이곳에서는 참혹한 죽음의 '카니발'이 벌어지기도 했다. 분수에 물 대신 피가 솟아올랐다고 할 정도로. ⓒ이석원

의사 기요탱이 발명한 기요틴이라는 흉물이 이곳에 놓이면서 혁명 후 1300여명이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참수형을 당한 참혹한 곳이기도 하다. 마리 앙트와네트와 루이 16세, 혁명의 주축에서 반역자의 누명을 쓴 조르주 당통, 그리고 당통을 숙청하고 처단했던 독재자 로베스피에르에 이르기까지 1793년부터 1795년까지 피의 숙청이 이뤄진 파리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화합'이라는 뜻의 콩코르드 광장으로 이름이 바뀐 이곳 벤치에 앉아서 아름다운 분수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면 이유 없는 두통이 올 때도 있다.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 정신은 단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실시하는 것이 목적도 아니었고, 왕과 귀족, 그리고 가톨릭 성직자를 몰아내고 그 대신 시민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정적을 죽이고, 문화유산을 때려 부수는 것도 아니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지나간 역사의 어두움은 아는지 모르는지 젊고 싱그러운 청춘들은 여기서 비보잉을 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벤치에 다정히 앉아 깊은 키스로 사랑을 확인하기도 하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황혼의 부부는 서로에게 기대 포근한 낮잠에 빠지기도 한다. 그들이 선 발 밑으로 파리의 참혹한 역사는 흐르는데 말이다.

◇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러시아의 예레미타쥐, 그리고 로마 바티칸의 바티칸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4대 미술관으로 불리는 루브르 박물관. 그러나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결국 탐욕스런 약탈과 도둑질의 결정체라니. ⓒ이석원

튈르리 공원까지 지나고 나면 카루젤 개선문 뒤로 루브르 박물관(Musee du Louvre)이 그 화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본래 루브르 박물관은 13세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한 요새가 지어졌던 자리에 샤를 5세가 거처를 삼으면서 왕궁이 됐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기인 1527년 프랑수와 1세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지었고, 궁전이 완성되면서 베네치아에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VIP로 초빙했다. 한동안 루브르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던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그림 중 한 점을 프랑수와 1세에게 헌사하게 되는데 그것이 '모나리자'다.

프랑수와 1세 때부터 왕실이 소유한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의 기능을 갖춘 루브르를 채우기 위해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물론 이집트에 이르는 정복지들마다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실 세계 최고의 미술관이라는 루브르는 남의 것을 빼앗아 만든 화려한 '장물 전시장'일 수 있다. 일본 못지않게 우리나라에서 많은 문화재를 강탈한 프랑스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루브르 박물관은 차라리 해체되거나 대폭 축소해서 위대한 예술 작품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마땅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관람해야 하는 루브르에 대해 씁쓸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 루브르 안에는 40여만점의 예술품이 전시돼 있다. 문명 발생기 메소포타미아의 선사 유물에서부터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 그리고 모나리자까지. 제12전시실 그리스유물실에 있는 밀로의 비너스의 진품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석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브르 박물관은 파리 여행에서는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과정. 무려 40만점에 달하는 예술품이 225개의 전시실을 차지하고 있는 루브르를 제대로 다 돌아보려면 하루 이틀 가지고는 택도 없다. 그 중에서도 1층 리슐리관 제4전시실 메소포타미아실에 있는 함무라비 법전과 제12전시실 그리스 유물실에 있는 밀로의 비너스는 필수다.

또 2층 드농관 제13전시실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루브르의 압권. 하지만 진품 '모나리자'를 구경하는 것은 보통의 행운으로는 안되는 일이다. 도난 위험 때문에 1년 중 불과 10여일만 진품이 전시된다. 제75전시실에 있는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대관식', 제77전시실에 있는 1830년 7월 혁명을 소재로 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의 작품 앞에는 1년 내내 엄청난 인파가 몰려서 제대로 그림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을 지경이다.

◇ 랑그르 고지의 몽타셀로에서 발원해 부르고뉴와 상파뉴, 그리고 파리와 노르망디를 거쳐 영국해협으로 흘러들어가는 세느강은 총 길이가 776km에 이른다. 파리를 통과하면서 세느강은 세게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강으로 변모햇다. 바다와 거리가 먼 파리의 위치 때문에 쉽게 해변을 찾기 어려운 파리 시민들을 위해 몇년 전부터는 세느강변에 엄청난 양의 모래를 풀어 여름에 한해 강변 모래사장을 만들기도 했다. ⓒ이석원

중학교 2학년 때 쯤, 교생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센 강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배낭여행으로 파리 여행 경험을 가진 이 교생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 파리의 센강이라고 하지만 가보니 똥물이더라. 차라리 한강이 더 깨끗하더라"는 것이었다.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라는 시를 통해 접한 센 강은 막연한 동경 속에서도 문학적 감성이 풍부하고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치장된 곳이었다. 그런 센 강을 직접 다녀온 사람이, 그것도 국문학을 전공해 국어 교생 선생님이 '똥물'이라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충격이었고, 배신감이었다.

"미라보 다리 밑에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 내린다. / 괴로움 지나고 이어 올 기쁨을 나는 잊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다. / 날이 저문다. 종이 울린다. 흐르는 세월 속에 나는 취한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술에 취한 넋두리꾼이었나? 하는 정서적 실망감은 이후 적어도 20년 동안 자취를 감추지 않고 늘 곁에서 괴롭혔다.

◇ 유럽 도시를 관통하는 강들에는 저마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세느강도 전설에서부터 실화에 이르기까지 숱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이 하나 둘 씩 꺼내질 때마다 파리는 늘 새로운 소설과 새로운 노래, 그리고 새로운 삶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석원

하지만 아폴리네르가 아니라 그 교생 선생님이 거짓말쟁이였다. 30여개의 다리가 놓인 채 파리의 한복판을 유유히 흐르는 센 강은 한강처럼 크고 웅장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중세에서 근대에까지 꾸준히 지어진 센 강의 다리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 작품이고, 어느 여행가가 "세느강의 다리만 걸어 다녀도 파리 2000년의 역사를 다 경험한다"고 말했던 것이 진실임을 느끼게 해준다.

파리 센 강의 한복판에 있는 시테섬(IIe de la Cite)은 파리의 시발점이자 프랑스의 기원이 되는 지점이다. 프랑스 역사에 따르면 기원전 300년경 이 시테섬에 '파리시(Parisii)'라는 원주민이 정착하면서 프랑스와 파리의 기원이 된다.

◇ 세느강의 한복판 시테섬에 우뚝 서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 노트르담(Notre-dame)은 불어로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말이라 비단 파리 뿐 아니라 프랑스 곳곳에 같은 이름의 성당이 있다. 이탈리아의 성당들에 '산타 마리아'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셈이다. ⓒ이석원
◇ 노트르담 대성당은 그 장구한 역사와 건축미학적 이야기보다도 곱추 콰지모도와 창녀 에스메랄다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곱추'로 더 유명해졌다. 안소니 퀸이 주연한 동명 영화에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그리고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서사성보다 서정성으로 치장되기도 한다. ⓒ이석원
◇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은 건축미학적으로 파리의 그 어떤 건축물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석원

시테섬에 우뚝 서 있는 2개의 웅장한 종탑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칭송받는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이다. 1163년 마르셀 드 쉴리 주교가 짓기 시작해 170년 동안 지어 1334년에 완공됐다. 프랑스 고딕 양식의 결정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섬세한 조각으로 성당 외벽을 치장한 화려함은 보는 이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웅장하면서도 절제와 균형이 잡힌 내부를 볼 수 있다. 그 유명한 장미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 소리만으로도 깊은 신앙심을 북돋아주는 파이프 오르간, 외부의 조각보다 더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성인들의 조각은 비록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저절로 숙연함에 고개를 숙이게 한다.

그러나 이곳은 단지 건축물로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주요한 역사와 함께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잔다르크의 명예회복 심판이 열렸고,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대관식이 열렸으며, 드골은 제2차 세계대전 승리와 파리 해방을 감사드리는 장엄한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 노트르담 대성당의 상징이 된 장미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 ⓒ이석원
◇ 노트르담 대성당은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대관식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이석원

그런데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관련해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1804년 스스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자신과 황비 조세핀의 대관식을 열기로 하고 로마의 교황 비오 7세까지 초청한다. 이전 프랑스 왕들의 경우 대관식은 파리 근교에 있는 렝스의 대성당에서 파리대주교가 집전해왔는데,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가 된 마당에 격을 더 높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을 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비오 7세가 나폴레옹에게 황제관을 씌우려는 순간 나폴레옹은 관을 빼앗아 스스로 썼다. 교황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 조세핀에게 씌울 관도 나폴레옹이 빼앗아 자기가 씌워주기까지 한 사건이다. 당연히 교황은 자존심이 상했을 터이지만 당시 전 유럽의 지배자였던 나폴레옹에게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로 가톨릭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반감을 나폴레옹이 보기 좋게 치유해준 사건으로 환영을 받기도 했다.

◇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라탱지구 쪽으로 세느강을 건너가면 강변 도로에 접한 자그마한 낡은 서점이 나오는데, 1919년 처음 문을 연 후 100년을 유지해오고 있는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이석원
◇ 서점안은 천정 높이까지 쌓아올린 책들로 인해 서점 특유의 그윽한 향이 배어 있다. 책을 찾아주는 종업원은 아무도 없고,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필요한 책은 손님이 직접 사다리까지 놓아가며 찾아야 한다. ⓒ이석원
◇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2층 고서적 코너를 옆으로 돌면 자그마한 문이 나오고 그곳을 통과하면 주로 시낭성회 등이 열리는 작은 카페가 나온다. 입구 벽에 적힌 '낯선 사람을 괄시하지 말자.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른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이석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파리의 지성이 숨 쉬는 라탱지구 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 길가에 녹색 간판이 선명한 낡은 서점이 보인다. 100년된 서점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 company)다. 1919년 11월 19일 미국문학전문서점으로 문을 연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최초 설립자가 운영난을 겪어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디면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인들의 쉼터 역할을 했다. '좁은 문'의 앙드레 지드는 이곳에서 부지런히 책을 빌려다봤고, 제임스 조이스의 역작 '율리시즈'는 내용이 풍기문란이라는 이유로 출판이 거절당했을 때 이곳의 사장인 실비아 비치에 의해 출판이 가능해졌다.

이후 서점은 단순히 서점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파리에 머무는 가난한 문학인들에게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안식처 역할까지 했다. 헤밍웨이를 비롯한 미국의 문학가들이 이곳에서 여러 날 의탁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영화 '비포 선 셋'에서 남녀 주인공이 9년 만에 재회한 장소로 유명해졌고, 캐나다의 저널리스트였던 제레미 머서의 책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으로 많이 알려졌다.

◇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퐁네프. 이 다리는 레오 카락스 감독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로 인해 더 유명해졌다. 영화 이후 전세계에서 모여든 수많은 젊은 연인들은 이 다리 위에서 밤을 새며 사랑을 속삭이기도 한다. 한때 파리시에서는 10대들의 탈선의 장소가 된다고 해서 단속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연인들의 공간으로 내준 상태다. ⓒ이석원

시테섬에서 센 강의 동쪽으로 첫 번째 만나는 다리가 '퐁네프(Pont Neuf'다. 'Pont'이 다리라는 뜻이니 굳이 퐁네프 다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1578년 짓기 시작했으니 400여년이 됐다. 센 강에 놓인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지만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다리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레오 카락스 감독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때문이다.

드니 라방과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했던 1992년 작인 이 영화 이후 퐁네프는 세계 연인들의 다리가 됐다. 퐁네프에서 노숙을 하는 남자와 시력을 잃어가다가 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퐁네프를 주무대로 한다. 영화 후반 센 강에 작은 배를 띄워놓고 밤하늘에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보는 장면에서 눈물까지 쏟아지는 이 영화는, 그런데 사실 퐁네프에서 촬영하지 못했다. 레오 카락스 감독이 파리시에 촬영 허가를 요청했지만 교통 통제 등의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래서 감독은 따로 세트를 지어놓고 촬영을 했다.

퐁네프를 지나면 '예술의 다리(Pont des Arts)'가 나온다. 루브르와 프랑스 학사원을 이어주는데, 원래 다리는 전쟁의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됐고, 지금의 다리는 1981년과 1984년 대대적으로 보수한 것이다. 보행자 전용 다리로 파리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늘 전시하고 있다.

◇ 세느강에 놓인 다리 중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아버지인 알렉상드르 3세에게 헌정하는 이 다리의 주춧돌을 놓았다. ⓒ이석원

좀 더 동쪽으로 가면 샹젤리제 거리와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을 이어주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Pont Alexandre Ⅲ)가 나온다. 센 강에 놓인 30여개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고, 프랑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일컬어지는 '벨에포크(Belle Epoque 1890~1914)' 시대에 만들어진 다리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3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으며,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친교를 표현한다는 의미였다. 1896년 알렉산드르의 아들 니콜라이 2세(마지막 차르)가 주춧돌을 놓았고, 1900년 만국 박람회에 맞추어 개통되었다. 근 100여년에 이르는 혁명의 시대를 지난 후 모처럼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구가하던 벨에포크의 시대 정신이 그대로 배어있는 다리로 유명하다.

다시 동쪽으로 더 가면 제법 웅장한 이에나 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벨에포크 시대의 또 다른 걸작인 에펠탑(La Tour Eiffel)이다.

◇ '파리의 흉물'에서 가장 파리다운 조형물로 신분을 바꾼 에펠탑. 이 거대한 조형물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모파상이 지금 이펠탑을 보면 뭐라고 말할까? ⓒ이석원
◇ 낮보다 밤에 더 아름다운 에펠탑은 그야말로 파리의 별이다. 해가 뉘엿뉘엿지고 밤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부터 반짝이기 시작하는 에펠탑의 조명은 빔에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피조물이 된다고 할 정도다. ⓒ이석원

아무런 설명도 필요없이 파리의 상징이 돼 버린 에펠탑은 그 화려하고 웅장한 자태보다도 더 유명한 게 27개월 공사기간 중 단 한 건의 안전사고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1889년 만국박람회가 끝난 후 모파상 등 지식인과 시민들이 파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를 요구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파리에서도 가장 많은 돈을 벌어주는 명소가 됐다는 것이다.

◇ 에펠탑 전망대에서 본 파리의 야경을 보지 못했다면 파리를 절반 밖에 보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빛의 도시라고도 일컬어지는 파리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에펠탑에서 바라본 마르스 광장의 불빛은 사뭇 우주의 어떤 모양을 보는 듯한 착각까지 일으킨다. ⓒ이석원

에펠탑의 야경은 환상적이다. 또 신비롭다. 센 강 위에서 보든, 개선문 꼭대기에서 보든, 또는 몽파르나스 타워에서 보든 에펠탑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매일 그 광경을 보는 파리 시민들도 매일 환호성을 지른다. 또 에펠탑 전망대에서 보는 파리의 야경은, 파리가 왜 빛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대부분 길게 줄 선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에펠탑에 오르지만 어떤 이는 해질 무렵 천천히 에펠탑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해 해가 지고 파리가 또 다른 빛의 축제를 시작할 때 전망대에서 파리를 온몸으로 느낀다. 그게 바로 파리라면서.

글/이석원 여행작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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