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선원은 왜 자기도 위험해지는 순간까지 대기방송을 했나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2016. 4. 16.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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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2주기 포럼 중계 ①] "책임회피 결정판은 박 대통령 '유체이탈' 화법"

'세월호 2년, 진실과 기억을 위한 연대'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렸습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둔 지난 9일 서울 제기동에 있는 역사문제연구소에서였죠. 여전히 세월호에 관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습니다.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날 포럼에서 소개된 주제발표 4건을 전합니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 세월호 선원은 왜 자기도 위험해지는 순간까지 대기방송을 했나
② 세월호 고통 앞에서 "중립 지키라"는 이들은 누구인가
③ "잊지 않겠다"던 다짐, 왜 "잊어가겠다"는 도피 낳고 있을까
④ "진상 캐야 하는데, 사무실 임차료·집기 외상으로 버티기도"
16일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인천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 내에 개관을 앞둔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에서 15일 오후 관계자들이 세월호 모형 설치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나는 안산에 살다가 세월호 참사를 경험한 까닭에 '세월호 진실 규명 과정'에 기록자로 참여하게 됐다. 기록 과정은 물론 그 이후에도 세월호와 같은 대형 재난 사고에 있어 '진실'이란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2009년부터 안산에 살았지만 안산 지역사회에 '얽힘'을 그다지 느껴본 적이 없었다. 2014년 4월 16일까지는 말이다"

책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쓴 416 세월호 작가 기록단 소속 오준호 작가는 '세월호 2주기, 우리는 어디까지 왔나 - 진실의 사회성과 시민참여적 의미'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기록단으로 활동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일에 대해 담담하게 고백했다.

그는 "한겨레 21의 부탁을 받아, 참사 1주일쯤 지난 후에 안산 지역을 취재해 르포를 썼다. 말이 취재이지, 누구와도 인터뷰를 하기 힘들었다"며 "학생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해서 주민들에게 '기분'을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생환 가능성을 전제해서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겨우 몇 마디 질문에 답해준 주민들 덕분에 르포 기사를 완성하기는 했다"고 전했다.

"단원고 근처 문구점의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혹시 단원고 아이들' 하고 말을 꺼내자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알던 아이들인데… 할 말 없어요.' 학교 앞 정자에서 한창 다른 얘기에 열을 올리던 노인들은 누가 '어이구 불쌍한 것들…' 하고 말을 꺼내자 갑자기 다들 입을 닫고 침울해졌다."

오 작가는 당시 취재 과정에서 만났던 지역 시민 활동가들의 제안으로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에 참여했다. 세월호 이전의 무수한 재난 참사가 관의 '공식적 설명'과 구분되는, '시민사회의 관점'으로 기록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는 달라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했다"고 그는 전했다.

"르포 작가, 영상, 사진, 기록 관리 분야로 다양한 전문인들이 결합했다. 당시 시민기록위원회 말고도 여러 기록 그룹들이 조직되었는데, 이는 세월호 참사 후 정부와 언론이 보인 부정적인 행태가 '저항적 기록 활동'을 촉발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오 작가는 "어떤 이는 '하나도 밝혀진 게 없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이미 다 밝혀졌다'고 말한다. 전자는 진실이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장막 뒤에 숨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 후자는 '재수 없어 당한 교통사고' 이상 세월호에서 찾아낼 건 없다고 한다"며 "나는 둘 다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그날 일어난 일은 '사고'일까 '참사'일까 '학살'일까? '사고'와 '학살'의 차이는 그날 있었던 일을 바라보는 태도가 전혀 다름을 뜻한다. 두 개의 관점은 진실 규명의 방법론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세월호 사고를 '학살' 즉 어떤 고의적인 의도나 음모의 결과로 규정해버리는 순간 사실의 조각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사실의 조각들을 다 모았을 때 뜻밖의 무서운 결론을 만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해도, 사실을 수집하는 과정에는 선입견을 접어두고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설명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는 "재판 과정과 이후 추가적인 자료 검토를 바탕으로 '세월호에서 벌어진 일들은 여러 단계에 걸쳐 사고를 낳았고, 그 사고는 또 여러 단계에 걸쳐 참사가 됐다고 생각한다"며 "어느 한 단계에서라도 '그건 안 돼'라고 브레이크를 걸었다면 눈덩이처럼 커지는 위험을 막거나 적어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견해를 밝혔다.

"어쩌면 '고의적 학살'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진술이 세월호 특조위 2차 청문회에서 나왔다. 여객부 직원 강아무개, 조타수 조아무개는 '승객은 제 자리에 대기하라'라는 방송을 지시한 주체가 청해진해운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것은 정말 참사의 '고의성'을 드러낸 증거일까? 하지만 나는 재판을 지켜보며 정말 풀리지 않았던 의문, 즉 '어째서 저 여객부 직원은 자기도 위험해지는 순간까지 바보처럼 대기 방송을 하였을까?'에 대해 실마리를 구할 수 있었다."

◇ "학생을 더 구하지 못했다" 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그 실마리에 대한 오 작가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만약 직원이 승객에게 임의로 퇴선을 지시했다가 304명 중 단 1명이라도 물에 휩쓸려 사망하면, 그 직원에게 문책이 가해질 수 있다. 직원으로서는 상부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게 편하다. 그런데 회사가 '대기'를 지시했다. 회사가 이 배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어쨌든 이후 발생한 결과는 회사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면 회사 직원은 왜 선원들에게 대기 지시를 내렸을까? 마찬가지다. '내가 책임질 테니 퇴선 시켜라'라고 말하는 상급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선원과 소통 채널을 맡게 된 사람은 대리급 직원 홍아무개였다. 평소 회사의 실세라는 물류팀 간부도, 안전 담당자인 해무팀 간부도, 청해진해운 회장과 임원들도 결정적인 이 순간에 아무도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이 부분은 보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청해진해운이 보여 온 모습에 비춰 나의 짐작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해경 구조 과정에서도 책임 떠넘기기의 모습은 반복됐다는 것이 오 작가의 분석이다.

"세월호 선원이 '지금 탈출하면 구조가 되겠습니까'라고 진도 vts에 묻자 담당 관제사는 vts 센터장에게 묻고, 센터장은 서해청에 전화를 걸어 묻고, 서해청 상황담당관은 또 상급자인 경비안전과장에게 묻는다. 다시 경비안전과정으로부터 상황담당관에게, 다시 진도 vts 센터장에게, 다시 담당 관제사에게 지시가 돌아온다. 그리고 진도 vts의 답변은 '우리는 그 배 사정을 잘 모르니까 선장님이 빨리 판단하시라'였다. 세월호 특조위 1차 청문회 때 '그 판단을 내릴 사람(서해청장)은 왜 아무 판단을 하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이 추궁됐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런 판단 책임을 져야 할 또 다른 상부 지휘자 목포서장 김문홍은 세월호 객실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9시 49분까지 어떠한 현장 지휘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김문홍은 특조위 1차 청문회 때 '왜 내가 안 한 것만 물어보느냐'며 역정을 냈다."

오 작가는 "상부는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보고는 숱하게 요청한다"고 꼬집었다.

"고작 13명이 승선한 해경 123정 조타실은 목포서, 서해청, 본청까지 상황을 보고하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그 지시에 응하느라 정신이 없다. 123정 정장 김경일은 그 급한 와중에도 스마트폰으로 여러 차례 인터넷에 접속한다. 현장 사진을 보내라는 상부의 요청이 있었을 것이다. 알려진 바대로 청와대도 그 골든타임에 해경 본청에 전화를 걸어 'VIP에게 보고해야 하니 다른 일보다 먼저 영상을 보내라'라고 독촉한다. 123정 정장 김경일은 30년 이상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말 그대로 베테랑이다. 어째서 그는 구조할 시간이 충분히 남은 상황에 세월호에 접근했으면서, 심지어 사고 현장까지 최고 속력에 가까운 속력으로 이동했으면서 이처럼 부실한 구조만을 한 것일까? 그에게 끊임없이 보고를 요청하는 상부의 존재는, 그로 하여금 이 절체절명의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나 집중력을 갖게 하기보다는, 상부의 지시에 따르면서 자신의 책임은 줄이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게 한 것은 아닐까?"

그는 참사 당시 세월호 일반 승객으로 타 있던 화물기사 김동수 씨의 죄책감과 선원·해경의 태도를 비교하며 한국 사회의 커다란 문제점을 끄집어냈다.

"김동수 씨는 '학생을 더 구하지 못한 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심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누구도 그에게 구조의 책임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그 책임을 내면화한 사람이다. 반면 선원이나 123정 해경들이 법정에서 보이는 모습은 일관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라는 태도다. '그들이 한 일'의 상당 부분은 회사에 보고하고 vts에 보고하고 해경 지휘부에 보고하는 일이다. 보고했으니 책임은 그리로 넘어갔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고작해야 '여분의 책임'에 불과하다는 태도다. 요즘 사회학에 유행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보고사회(報告社會)'라고 명명해도 될 듯하다. 모두들 정보를 알고 싶어하는데, 그 정보에 근거해 책임지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서다. 상부는 끊임없이 보고를 원하지만 책임은 자신이 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정판은 '여기 있는 사람들 (나는 빼고) 다 옷 벗어야 합니다'라던 박근혜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일 것이다."

◇ 세월호 2주기, 우리는 어디까지 왔나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참사의 배후에 '고의'나 '기획'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 작가는 "나는 '음모론'이라는 낙인을 찍어 어떤 가설을 원천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어떤 사건의 배후에 실제로 고의나 음모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에 제기된 여러 음모론들은 재판과 청문회 등을 통해 사실 관계 차원에서 많이 반박됐다고 생각한다. 다만 참사 2년이 되는 지금 진실 규명 과정에서 시민들이 제기하는 음모론이 갖는 효과들을 논할 필요는 있다. 정부가 정보 공개에 투명하지 않고 시민 참여를 근원적으로 터부시할 때, 음모론이 제기될 환경이 조성된다. 그 음모론들은 일견 황당무계하지만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사실의 실마리를 포함하고 있어서, 사건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나는 세월호를 둘러싼 사고 초기의 의혹들을 유가족이 법정에서 제기하고 피고와 전문가의 답변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의혹을 제기한 사람이 원한 답은 아니었더라도, 세월호 사고를 입체적으로 보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한 의혹의 예로 작가는 '오렌지맨'을 들었다. "법정에서 마스크를 쓴 오렌지맨으로 지목된 이의 신원을 확인해 그가 기관부 선원임을 확인했는데, 그는 왜 두꺼운 파카(오렌지색)를 입었느냐는 질문에 저체온증에 대비하려고 '본능적으로' 두꺼운 옷을 입었다고 대답했다. 비슷한 행동 패턴을 다른 선원들에게도 볼 수 있었으므로, 이는 선원 심리를 일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는 "음모론은 음모를 제기하는 그 자체보다는 음모론자가 설정한 가설에 증거와 자료를 꿰어 맞추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비판했다.

"진실 규명 과정은 사금을 건져내듯 끈기 있게 남길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해가는 작업이다. 음모론적 문제제기는 확실한 사실을 얻는 것보다 자신의 이론의 완성을 위해 논리적 비약과 증거의 취사 선택을 선호한다. 그런 방식이 흥분한 여론과 결합하면 차분하고 객관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진실 규명 과정이 힘들어진다. 또한 극단적인 결론에 동의하기 힘든 다수 시민으로부터 세월호 의제를 고립시키는 결과도 낳는다."

그러면서 오 작가는 재차 "진실은 복잡하고 사회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세월호 진실 규명의 진정한 의미란, 미래의 어느 날에 2014년 4월 16일을 돌아보았을 때 그 날을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시하기 위해 인적·제도적 혁신과 시스템의 전면적 개혁이 시작된 날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인 진실의 섬세한 결을 더 많이 찾아내고 성찰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의 매끈한 시나리오를 얻는 것보다는 딛고 나아갈 수 있는 단단한 팩트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무 것도 밝혀낸 게 없다'라고 좌절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음모의 실체를 찾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의 허무주의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진실 규명의 도정에 있다. 진실의 조각들이 많이 드러났으며 그것을 끈으로 더 많은 진실을 앞으로 발굴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들을 토대로 하여 인문학·사회과학적 이론화, 안전 시스템의 혁신도 본격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물론 노란 리본을 달고 인양을 촉구하고 객관적 기록물을 읽고 유가족과 나란히 서는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진실 규명을 추동하고 찾아낸 진실의 조각을 사회적 의미로 재구성하는 힘이다."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jinuk@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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