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아흔인 지금도 가끔 詩 쓰지만 '절제' 없으면 한낱 티끌"

장재선 기자 2016. 8. 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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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 시인이 지난 1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자택의 2층 서재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책을 보면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했으나, 힘을 주어 말하진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삶의 품격을 높이려면 바르고, 곧고, 따뜻하게 살려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김종길 시인

“한국 문단의 정신적 지주이시죠.”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오세영 시인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벗이었으며, 청마 유치환과 가까이 지냈다. 그의 시작품 ‘성탄제’ ‘설날 아침에’ ‘고고(孤高)’는 교과서에 실렸다. 그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 시인 T S 엘리엇이 생존해 있을 때 직접 만나서 시문학에 대해 논한 영문학자이기도 하다. 올해 만 90세인 그는 요즘도 우리말 시를 쓰고, 한시(漢詩)를 짓는 모임에 나간다. 그는 문학인들에겐 전설적인 이름이지만,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학자로서, 시인으로서의 본령을 지키느라 외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김종길 시인. 그를 지난 1일 만났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였다. 북한산 인수봉이 가깝게 보이는 동네의 아담한 2층 양옥으로, 잔디밭과 감나무 등이 있는 조촐한 정원을 갖추고 있었다.

“내년 11월 7일이면 여기서 산 지 만 40년이 돼요. 1977년 11월 7일 입주했지. 그땐 주위에 빈터가 많았는데….”

젊었을 때부터 ‘과묵한 학자 시인’으로 유명했던 그의 말은 대체로 짧았고, 음성은 나지막했다. 그런데 어떤 일을 기억할 때 아주 세부적으로 묘사해서 감탄을 자아냈다.

당뇨병과 고혈압을 신경 쓰고 있다고 했으나, 1층 응접실에서 2층 서재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부축을 사양할 정도로 건강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와 70년 넘게 해로하고 있는 부인(강신향 여사)이 최근 고관절 부상으로 거동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날 응접실에 놓여 있던 주스 잔은, 요즘 함께 살고 있는 장남(김선국 한양대 법대 교수)이 차려놓은 것이라고 했다. “집 아이가 여기 혼자 들어와 있어요. 집 아이의 다른 가족은 모두 미국에 있어요.”

그가 연전에 발표한 작품 ‘그것들’에는 멀리 있는 손자들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친손 남매와/외손 남매가 다/미국과 캐나다와 영국에 있으니//그것들은 다/멀리 하늘가에/살고 있는 셈이다.//우리 두 늙은이는 아침저녁으로/먼 하늘가를 바라보며/그것들을 그리워한다.//또 한 해가 저물어가니/더욱 그것들이 그리워진다.’

―집 문패에 함자가 두 개 적혀 있더군요.

(그의 본명인 ‘金致逵’ 옆에 조그맣게 ‘宗吉’이라는 이름이 병기돼 있다.)

“규(逵)가 항렬자예요. 따라서 나도 치규라는 이름을 썼지. 그런데 선친께서 규 자는 잘 안 쓰는 글자이니 길(吉) 자로 하자며 맏이니까 종(宗)을 쓰자, 이렇게 된 거예요. 보통학교(초교) 때는 치규라고 불렀어요. 그러다 일제강점기 말에 창씨개명을 강요당했는데 그때 ‘金城(금성)’이라고 지었고, 일본식 성에는 종길이 더 어울린다고 해서 해방 이후에도 종길이란 이름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성명 복구령(姓名復舊令)’이 떨어졌고, 그래서 치규라는 본명을 다시 썼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김종길 시인’이었으나, ‘김치규 교수’였다. 고려대 문학도들은 그가 교정을 거닐면, “저기 김치달 교수 가신다”고 했다. ‘규(逵)’ 자가 어려워서 ‘달(達)’로 보이는 것을 빗댄 것이다. 숙명여대에 재직했던 김남조(金南祚) 교수를 한 제자가 김남작(金南作) 교수로 잘못 알았다는 일화와 같은 맥락이다.

노 시인은 “학생들이 나를 김치달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라며 허허, 웃었다.

―요즘도 시작(詩作)을 하신다고요.

“가끔 써요.”

―새 시집은 언제쯤 내실 건가요.

“앞서 낸 시집이 ‘해거름 이삭줍기’(2008) ‘그것들’(2011) 등인데… . 아직 새 시집을 낼 분량은 안 돼요. 발표한 걸 모아서 시선집을 낼까 고민 중입니다. 모르겠어요. 생전에 시집을 낼 수 있을지…. ”

―시인으로서 과작(寡作)인 편인데….

“원래 시를 많이 안 썼습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강의하다 보면 시에 전념할 수 없지 않나요. 집안 조상 중에 ‘표은(瓢隱)’이라는 호를 쓰시던 분이 있어요. 표은이 조선 숙종 때 ‘많은 시 또한 한낱 티끌이다”라고 하셨어요. 쉽게 쓴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에는 언어와 감정의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처럼 시인이 많은 나라도 없는데 대중은 시가 어려워서 읽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해방 후에 한동안 우리 시가 좀 어렵게 돼 있었어요. 서양 시를 어설프게 받아들인 것도 있고. 어려워도 좋은 시가 있고, 어렵기만 하고 좋지 않은 시도 많아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시는 안 썼어요.”

―한시 모임에 계속 나가시나요.

“한 달에 한 번 가요. 일산구 화정동에 ‘난사(蘭社)’라고, 이우성(성균관대 명예교수)·조순(전 경제부총리)·김용직(서울대 명예교수)·이용태(전 삼보컴퓨터 회장)·이종훈(전 한국전력공사 사장)·이장우(영남대 명예교수) 씨 등이 같이해요. 1975년부터 시작된 모임인데 나는 1979년부터 했어요. 37년 됐네. 이헌조(전 LG전자 고문), 유혁인(전 공보처 장관), 김호길(전 포항공대 교수), 고병익(전 서울대 총장), 김동한(전 건설부 토목국장) 씨 등도 함께했는데 다 먼저 (저세상으로) 돌아갔지.”

경북 안동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시를 접했다고 한다. 그가 스스로 지은 아호 석하(石霞)는 안동 출신의 시인 이육사가 북한산 자락의 수유동에 살 때 쓴 한시에서 따온 것이다. 인수봉과 백운대의 노석(老石)에 피어 있는, 맑게 갠 날의 노을(晴霞)을 뜻한다. 평생 고고한 품격을 지향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시인으로서 영문학보다는 오히려 한시 전통에 더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한학 하는 집안 출신이니까. 우리 집성촌에선 5세가 되면 천자문 학습을 하게 돼 있었어요. 증조부가 남매를 뒀는데 그 아드님이 결혼 후 스무 살 때 후사 없이 돌아가시자, 조카의 자제 중 둘째였던 내 선친을 양손으로 입양하셨어요. 그 집안의 종손이었던 나는 무척 귀여움을 받고 자랐어요. 내가 두 살때 어머니를 여의었어요. 그러니 증조부와 증조모가 나한테만 매달려서 지극정성으로 대해 주셨지요.”

그의 대표 작품 중의 하나인 ‘성탄제’는 혈육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이윽고 눈 속을/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그 붉은 산수유 열매…. ’

―5세 때부터 한시를 지으셨다고요.

“우리 마을 아이들이 증조부에게 글을 배우러 다녔어요. 나는 자연스레 입학하기 전부터 한자를 공부하게 됐지. 4∼5세 때 지은 한시가 있어요. 증조부께서 조상님 제사를 갔다 오시면서 나를 위해 송편을 가져다주셨는데 그걸 보고 좋아서 시를 읊었어요. 처음엔 구문이 안 돼요. 금조월이식(今朝月二食)하니 복중만광명(服中滿光明)이라. 오늘 아침에 달을 두 개 먹으니 배 속에 광명이 가득하다는 뜻이에요.(그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대목에서 아이처럼 신나는 표정이 됐다.) 또 한번은 한시 쓰는 행사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시제를 봤는데 오류선생(五柳先生)이더라고요. 중국 진나라의 문인 도연명을 일컫는 말이지. 그런데 어린 나야 그 뜻은 모르고 그저 버드나무 다섯 그루인가 보다 했죠. 그러고는 한시 심사를 하던 생가의 조부(선친의 생부)가 ‘너도 한마디 할래’ 하시기에 ‘네, 그러죠’ 했지요. ‘오류선생 댁은 문전(門前)이 청천지(靑天地)’라. 버드나무 다섯 그루 있는 집 앞은 그 색이 푸른색 일색일 것이다, 라고 썼지요. 그걸 보고는 조부가 ‘청천지’에 관주(貫珠·붉은 표시로 칭찬함)를 여러 개 그리며 좋아하셨어요. 그때는 왜 좋아하시는지 영문도 몰랐지.”

―대구사범 5년 과정을 마치고 안동초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해방이 되자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동국대 전신)에 입학하셨지요.

“대구사범을 나온 게 해방되던 해 3월. 신학년이 4월에 시작되는데 안동초교로 발령을 받았어요. 거기서 한 학기 수업을 했어요. 가르치다 해방을 맞았어. 그래서 그만두고 상경한 거예요.”

그는 혜화전문에서 무애 양주동 선생 등으로부터 국문학을 배웠고, 나중에 고려대 영문학과로 편입했다. 무애는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국문학으로 바꿨는데, 그는 반대로 국문학에서 영문학으로 갈아탄 셈이다.

―양주동 선생이 무척 아낀 제자였다고 들었습니다.

“(6·25전쟁) 피란 시절에 양 선생이 대구에 와서 영어 강습을 했어요. 양 선생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영문과 나온 사람이에요. 영어강사로 유명했지. 그런데 그분이 ‘내가 해방 후에 출강한 학교가 수십 개교가 되지만 그중 후계자라 할 만한 학생이 딱 한 사람 있었는데, 이 사람이 문학을 하다가 영문학으로 도망갔다’라고 내 이야기를 하더래요.”

그는 혜화전문에 다닐 때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2학년인 1947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문’이 당선돼 등단했다.

“그전 1946년 봄학기에 을유문화사 주간신문 현상모집에 동시가 뽑혔어요. 그때 그 신문의 주간이 윤석중 선생이에요. 상금 받으러 갔다가 거기서 일하는 박두진 시인도 만났어요. 그때 당선된 동시의 제목이 ‘바다로 간 나비’예요.”

그는 그 동시를 나지막이 암송했다. ‘나비 한 마리 바다로 갔습니다. 달도 푸르고 바다도 푸른 밤에 어린 나비는 돛배가 되었지요. 흰 돛을 달고 돛배가 되었지요.’

―청록파 조지훈 선생과 교우하신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윤석중, 박두진 선생과 인사했더니 거기 지훈이 있었어요. 지훈은 나보다 나이로는 6세 연상이에요. 고향이 근처고 집안끼리 알고 있고 해서 같이 종로 다방으로 나와 이야기를 했어요. 6세 차이지만 안동 문화권에선 나이가 7년 연상까지는 집안끼리 알면 친구로 지내요. 그러니까 지훈이 ‘허교(許交·벗으로 사귀는 것을 허함)하세’ 하더라고요. 그래서 친구가 됐지. 지훈을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로 초빙하려고 할 때 심부름을 간 것도 나야. 나는 영문과였지만, 지훈의 친구로 알려지면서 국문과 심부름을 했어요.”

―지훈을 아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큰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 가지 면을 다 갖춘 비범한 인물이에요. ‘붓과 칼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죠. 보통 인물이 아니에요. 가장 큰 특징은 재주가 비상하다는 점이고 기개도 넘쳤어요.”

그는 여기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훈의 가족사를 들려줬다. 집안끼리 알고 지낸 터라 그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지훈 조부 조인석(趙寅錫)은 그 일대에서 재주가 대단한 인물로 알려졌어요. 4남매를 뒀는데 모두 훌륭하게 자랐어요. 둘째 헌영(憲泳·지훈의 부친) 씨는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을 정도니까. 그런데 6·25전쟁이 나자 월북했어. 당시 보성전문의 좌파 허헌(許憲)이 친구였는데 허헌이 월북할 때 같이 간 거지. 전쟁 중에 지훈 조부는 자결했고, 지훈 모친은 대구 피란 때 별세했어요. 지훈 가족사가 파란만장하지. 지훈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인데, 그가 대구 피란 가기 전에 부친을 만났을 때 부친이 그랬대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조지훈은 명문 선비 집안의 후예였다. 의병장 출신의 선비였던 증조부 조승기(趙承基)는 일제 강제병합에 자결했고, 구한말 사헌부 대간을 지낸 조부 조인석은 6·25전쟁 때 마을이 인민군에게 유린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헌 의원이자 한의학자였던 부친 조헌영은 6·25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렇게(월북한 것) 들었지만, 납북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노 시인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와 공식 역사 기록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지훈에게서 직접 들은 지훈 부친의 당부를 다시 들려줬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젊으셨을 때, 미당 서정주 선생과 논쟁을 한 적도 있지요.

“논쟁 비슷한 것을 했죠. 1964년이에요. 젊을 때지. 나는 미당 시를 일제강점기 대구사범 때부터 읽고 있었어요. 아주 훌륭한 시인이라고 생각했어요. ‘화사집’이 제일 좋았는데 ‘귀촉도’ 이후론 시가 점점 이상해지는 거야. 그래서 (샤머니즘 쪽으로 갔다고) 비판했지. 아마 미당도 화가 났던 모양이야. 나중에는 서로 인정하고 친하게 됐어. 미당이 내가 자신의 후기 시를 평한 것을 보고는 역시 시는 김 아무개가 볼 줄 안다고 했다더라고.”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을 꼽는다면.

(그는 여기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당, 지훈, 목월, 혜산(박두진) 이런 사람들인데. 개인적으론 청마와 가까웠어요. 청마의 시는 미당의 시보단 단순해요. 하지만 청마는 인간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경북대 시절에 잠시 같이 강단에 선 적도 있어요. 당시 나는 강의 초보자였는데 90분 수업을 꽉 마치고 나오면, 청마가 먼저 마치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얘기할 게 뭐 그리 많노’라고 농담을 했어요.”

―문학작품을 읽지 않는 시대, 문학의 위기라고 하는데.

“추세라면 추세지. 어쩔 수 없는 거지.”

문학인들은 이 경우에 보통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문학의 운명이 있다면 순명(順命)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평생 책을 보며 사셨는데, 책이 있는 삶과 없는 삶에 차이가 있을까요.

“좀 다르겠지. 어떻게 다른지 말하기 어렵겠지만.”

―책을 읽으면 삶의 질이 높아질까요.

“물론 그렇지.”

―한강 작가의 맨 부커상 국제부문 수상에서 보듯 우리 작가들이 해외에서 점점 더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강 작가의 수상, 참 좋아요. 좋은 작품이 서구어로 잘 번역이 돼야 해요. 원어민이 번역하든 자국인이 번역하든 간에 번역이 잘돼야 하고 좋은 번역가가 많이 나와야 해요. 번역원 같은 곳의 번역 양성 시스템도 중요하고….”

―문학 밖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무엇보다 건강 비결이 궁금합니다.

“내가 일찍 실모를 했어요. 그래서 집안의 노인들이 다 나한테만 매달렸어요. 증조부께서 내게 한 4∼5세 때부터 초등 5년까지 춘추로 보약 한 제씩 해주셨어요. 그 덕이 아닌가 생각해요. 하하.”

―게다가 권력이나 출세에 연연해하지 않으신 것도.

“나는 통속적인 욕망은 없어요.”

―희로애락에 시달리지 않는 기질을 갖고 계신 듯싶습니다.

“네, 약간 좀 초탈하는 것. 기질적으로 그렇기도 하도 수양도 했어요.”

그의 시 ‘고고’는 세상사에 초연하며 고고한 품격을 지니겠다는 염원을 북한산에 의지해 표현하고 있다. ‘북한산이/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다시 겨울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심지어는 장미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그 고고한 높이를 회복하려면//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기다려야만 한다.’

―어려운 질문을 드려보죠. 90년 생애 동안 대한민국의 역사는 발전했다고 보십니까.

“글쎄, 그게 발전이란 게 뭔지 따져봐야 하지만, 경제적으론 발전했으나 여전히 혼란, 불합리, 부조리가 많지 않나요.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희박해져서 혼란해지고…. 전통적인 것도 한편으론 살아 있어야 좋아요. 정치적으론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기본적인 안정을 취하고 있긴 한데…. 복지정책도 자유민주주의 기본 아래에서 펴야 합니다. (일각의 주장처럼)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해서는 정상적인 발전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장수시대가 되면서 사람마다 노년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노년의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인간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고, 곧고 바르게, 그리고 따뜻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의 주역이 돼야 할 청년들이 취업하지 못해 고통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인내를 당부하고 싶어요. 세상을 근시안적으로 보지 말고, 느긋이 생각하며 슬기롭게 대처해줬으면 합니다.”

그의 답은 단순했으나 여운이 길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의 시 ‘설날 아침에’의 한 대목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세상은/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장 jeijei@munhwa.com

정리 =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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