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최악의 발굴 '악명'..만신창이가 된 창녕 고분들

2016. 8. 2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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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⑭ 1918~19년 창녕고분 발굴의 참극

화차 2대 분량의 어마어마한 유물들 쏟아졌지만
야쓰이는 보고서 한장 내지않고 유물들 빼돌리기에 급급했다
그뒤 방치된 고분들은 도굴꾼과 일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야쓰이가 찍은 1918~19년 창녕 교동고분의 굴착조사 현장. 봉분 한쪽을 허물고 내부 석실 구멍을 노출시킨 모습이다. 조선인 인부들과 그들이 가져온 흙지게 등도 보인다.

한국 고고학사상 최악의 발굴을 꼽는다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하룻밤새 무덤 안 유물을 깨끗히 청소해버린 1971년 무령왕릉 조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엔 이를 능가하는 보물 싹쓸이 작전 같은 발굴 참사가 두고두고 일본 학자들 입에 오르내렸다.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불과 두달여만에 비화가야의 옛 터전인 경남 창녕 교동고분군의 대형 무덤 9곳의 유물들을 싹쓸이하듯 걷어간 뒤 보고서조차 내지않은 야쓰이 세이이츠의 단기조사 작업이 그것이었다.

가야권 유적들은 1910년 건축사학자 세키노 타다시와 야쓰이의 조사단이 조선 고적을 예비답사할 당시부터 상당한 눈길을 받았다. 당시 진주 옥봉·수정봉 유적과 고령 지산동 산허리의 가야고분군, 도굴로 일부 석곽이 드러난 창녕 고분군을 답사한 세키노는 “가야 유적이야말로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조사성과”라고 평하기도 했다. 일본과 가장 인접한 경남 일대 가야권에서 임나일본부설과 3세기 진구왕후의 한반도 정벌을 실증할 증거들이 나올 공산이 가장 크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주와 가야권을 잇는 낙동강변의 요지 창녕에는 산자락에 경주에 버금갈만큼 많은 고분군들이 흩어져 이마니시 류 등의 여러 일인 학자들이 일찍부터 눈독들이며 답사를 진행했다.

이런 와중에 교동 발굴에 나선 야쓰이는 마음이 초조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일대 낙랑계 유적 발견에 뒤이어 한반도 남부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할 유적 출현을 고대했으나, 1917년 그가 조사하면서 ‘왜’ 자체로 단정한 전라도 나주 반남고분 외에는 백제·신라권에서 도드라진 실물들이 나타나질 않았다. 이런 실정에서 1918년 창녕 교동고분을 처음 발굴조사한 후배학자 우메하라 스에지, 하마다 고사쿠가 토기와 장신구 등 주목할 만한 출토성과를 보고하자, 야쓰이는 갑자기 마음이 동해 그해 12월 겨울인데도 창녕 교동 일대의 거대 고분으로 달려갔다.

춥고 땅이 딱딱한 악조건 속에서 야쓰이는 가장 큰 규모인 7호분과 89호분의 굴착조사에 매달렸다. 교동 7호분은 봉토의 지름이 31.2m, 높이 8.5m에, 내부 석곽의 주검방 길이 9.0m, 너비 1.7m에 이르는 초대형 고분이었다. 발굴 인부들은 봉토 남단벽의 상부가 완전히 노출된 상황에서 벽석의 일부를 제거하고 깊은 곳 석곽 안을 대놓고 드나들었다. 무덤 봉분 한쪽을 허물어뜨려 내부의 석곽과 널길이 완전히 드러나게 한 뒤 그 안의 유물을 노골적으로 쓸어담는 작업장 얼개였다. 문자 그대로 보물털기식 발굴이었던 셈이지만, 창녕이 <일본서기>에 진구왕후에게 항복해 조아린 7개국중 하나로 기록된 ‘비자벌’임에 분명하다는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던 야쓰이에겐 정벌과 복속의 흔적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야쓰이의 조사 당시 돌로 쌓은 창녕 교동고분 석실 내부를 찍은 사진이다. 내부에 토기류가 가득 들어차있다.

현장에서는 전례없이 막대한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석곽안 무덤방은 그릇받침인 기대나 목긴 항아리 장경호, 굽다리 접시 등의 토기들로 가득했다. 영남권에서는 처음으로 금동관의 파편과 금제귀고리, 은제대금구, 장식대도 등 고급 금공예품들이 나왔다. 우메하라 스에지 등의 일본 학자들이 마차 20대, 화차 2량 분량의 유물이 고분을 빠져나갔다고 회고할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그러나 야쓰이는 이 거대 고분에 대해 보고서 한장 내지 않고, 유물들만 반출해버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관련 문서기록을 보면, 야쓰이가 7호분에서 캐어간 유물들만 최소 700점이 넘는다. 하지만, 9기의 대형고분에서 발굴한 전체 유물들의 수량과 내역은 지금도 전모를 모른다. 마구나 금공품 등의 몇몇 일급 유물은 총독부 박물관에 보냈지만 상당수는 딴 곳으로 빼돌렸을 것이란 설이 유력하다. 왜 보고서를 내지 않았는지 야쓰이는 비망록에 기록을 남기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추정해볼 수 있다. 창녕고분에서는 고대 일본과의 관련성을 입증할 유물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출(出)자형의 금동관 파편이나 환두대도 등에서 보이듯 7호분과 89호분에서 나온 유물들은 대부분 친신라계통 유물들이 대부분이고, 일본과 연관되는 건 직호문이란 무늬가 새겨진 칼집 장식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왜곡된 학문적 목표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한 야쓰이가 보고서 작성에 의욕을 잃고 유물 반출에만 눈을 밝혔던 셈이다.

창녕 고분의 후일담은 비참하다. 19년 조사가 끝난 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들은 도굴꾼들의 일차 표적이 되어 벌집을 쑤신 듯했지만, 총독부는 도굴구멍만 막는 땜질대책만 내놓았다. 대구에서 장사하던 상인 오쿠라 다케노스케는 그 사이에 창녕 고분 출토·도굴품들을 마구 빼돌려 악명높은 오쿠라컬렉션을 구축했다. 막강한 지역세력이던 창녕의 가야 선조들 무덤은 그렇게 만신창이가 됐고, 해방 뒤에도 무덤과 유물의 성격, 실체는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파묻혀졌다. 2012년 우리문화재연구원이 교동 7호분을 90여년만에 재조사해 유구 보고서를 냈고, 국립김해박물관이 2015년 출토유물 보고서를 뒤이어 낸 것이 선조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됐을까.

정인성 영남대 교수·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야쓰이 비망록이란? 정인성 교수가 지난해 일본에서 입수한 야쓰이의 조선 고적 조사 관련 문서 1만여점의 컬렉션. 1909년 첫 고적 조사 당시 답사일지와 촬영 목록, 각종 메모와 경비 영수증까지 포함돼 일제강점 초기 고적 조사의 세부를 살필 수 있는 일급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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