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서가 있었지 라고 기억해주면 고마울 것 같아요. 멘트로 되돌아본 구봉서의 삶

정현목 2016. 8. 27.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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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서는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이자, 삶이 고달픈 서민들에게 웃음으로 행복을 주고자 한평생 노력했던 '천생 광대'였다.

해학과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그의 코미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견뎌내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가 4년 전 한 매체(웅진 지식하우스)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주옥같은 멘트들을 통해 그의 삶을 되돌아봤다.

"배고프고 힘든 시절, 국민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었으니 저는 분명 행복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박장대소하면서 웃는 걸 볼 때 가장 좋아요. 그런 거 보면 코미디가 제 운명이지요."

"열아홉 살 때 아코디언을 들고 거리를 걸어가는데 누가 불러요. 악사가 부족하니 같이 하자더라고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가수 김정구 형제가 이끄는 태평양 가극단 사람이어서 솔깃했어요. 아버지는 제가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고 정말 엄격하셨습니다. 또 당시는 '딴따라'라고 말하며, 배우에 대한 비하가 심할 때였죠. 김정구 선생의 형, 김용환 선생이 집에 찾아와 아버지께 간곡히 사정해서 '그럼 딱 사흘만 해라'는 허락을 받았어요.
구봉서의 학창시절 모습
그 사흘이 나흘이 되고 열흘이 되고 그러다가, 어느 날 배우 한 명이 사라진 거예요. 김용환 선생이 저보고 대신 올라가라고 해서 얼떨결에 무대에 서게 됐죠. 앞이 깜깜하고 정신이 없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대사를 지어내서 했는데, 손님들이 웃고 난리가 난 거예요. 그날로 악사에서 희극 배우가 되었어요. 물론 집에서는 내놓은 자식이 되었고요. 김정구, 김용환 선생님을 만난 것은 제 인생에 있어 정말 큰 행운이었어요. 아니었으면 어려움 모르고 자란 안하무인의 몹쓸 인격자가 되었을 지도 몰라요."

"4.19혁명으로 영화계가 많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검열이 사라지면서 5.16 전까지 한국 영화가 전성기였죠. 그때는 전면적인 사회 비판은 아니더라도 희극화하는 방법으로 세태를 풍자했지요. 그런데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죠. 1961년에 나온 '구봉서의 벼락부자'는 돈만 아는 세상에 대한 풍자였는데, 제가 돈이 너무 많아 돈을 뿌리고 다니는 장면이 나왔어요. 그것도 뭐라고 하더라고요. 귀중한 돈을 뿌리다니 말이 되냐면서. 그렇게 걸리는 게 많았어요. 도대체 뭘 하면 걸리지 않을까 해서 거지를 했더니, 그때는 또 우리나라에 거지만 있는 줄 알겠다며 또 난리더라고요."

"'안녕하십니까? 구봉서입니다'는 1963년에 시작된 동아방송 개국 프로그램인데, 매일 아침 저 혼자 5분 동안 하는 라디오 원맨쇼였어요. 그때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안 됩니다' 라는 유행어도 낳았죠. '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5분만 해서 이거 되겠습니까? 안됩니다'라고 쓴 팬레터가 왔던 게 기억이 나네요."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이 1969년 '수학여행'이라는 영화를 찍었어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정극이었는데, 제가 주인공인 섬마을 선생님 역할이었죠. 유 감독이 이 영화를 국제영화제에 내보내기 위해 A급 영화로 문공부에 제출했어요. 그런데 문공부에서 B급 판정을 준 거예요. 희극배우가 주연한 영화라는 게 이유였어요. 그러면서 유 감독보고 하필이면 그런 영화를 출품하려고 하냐고 했대요. 창피하다는 거죠. 이 영화가 그해 테헤란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았어요. 방송국에서 인터뷰하러 몰려왔기에 '나라의 높은 분들이 B급 영화라고 했는데, 상을 받았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수준이 문공부 관리들보다 못한 모양이죠'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문공부에서 주최하는 축하 파티에도 가지 않았어요."
1970년대 MBC ` 웃으면 복이와요 ` 의 한 장면. ( 왼쪽부터 ) 임희춘, 구봉서, 서영춘 씨 [ 사진제공 = 문화체육관광부, 중앙포토, 임희춘 ]

"MBC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는 1969년부터 1985년까지 장장 15년 8개월을 한 작품이에요. 대본은 거의 우리 코미디언들이 썼어요.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는 귀한 자식을 오래 살게 하려고 지은 이름인데, 70자가 넘어요. 이름이 너무 길어 생기는 에피소드를 매회 다뤘는데, 인기가 좋았죠. 우리끼리도 코미디하면서 정말 많이 웃었어요. 서로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져 NG를 많이 냈어요.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를 하면서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칠까를 상상하면 벌써 웃음이 나는 거예요. 배삼룡이나 양석천 씨는 그래도 웃음을 잘 참았는데, 서영춘 씨는 웃음소리를 안 내려고 온갖 인상을 쓰면서 신음 소리를 냈어요. 그럼 또 웃음이 빵 터지고 그랬죠."

"그냥 남을 웃기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 안 하는 것을 생각하려고 많이 고민했죠. 평소에도 사람들의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고요. 의사는 진찰을 어떻게 하는지, 목사님은 어떤 말투를 쓰는지, 트럭에서 짐 내리는 것도 한참 쳐다보고요. 평소에도 계속 웃음의 코드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요. 책도 많이 읽고요. 사람을 웃기기 위해서는 치밀한 사전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 나게 웃어봤습니다'란 말이 저는 가장 듣기 좋아요. 한국의 코미디언은 한국인의 수명을 늘려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웃음은 울적한 사람, 심심한 사람, 피로에 지친 사람, 화가 잔뜩 나 있는 사람의 기분을 돌려놓을 수 있거든요. 한번은 문공부에서 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장관이 큰일 났다며 앞으로 조심하라는 거예요. 초등학교 아이들한테 존경하는 사람 이름을 쓰라고 했는데 구봉서를 쓴 아이들이 꽤 많았나 봐요. 코미디언을 존경한다니 말이 되냐며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었나 봐요. 그렇게 한편에서는 인정을 받고, 한편에서는 홀대를 받고 그랬죠. 사람들이 구봉서를 떠올리며, 그래 옛날에 구봉서가 있었지, 그 사람 코미디할 때 좋았어, 지금은 살았나 죽었나, 그래주면 고맙고 좋을 것 같아요."

"찰리 채플린과 같은 눈물이 있는 코미디를 좋아합니다. 구봉서의 코미디도 가슴이 찡한 코미디이길 바랍니다. 채플린의 영화는 분위기가 어두워요. 바닥에 깔린 슬픔을 반전시키며 웃음을 자아내죠. 이렇듯 코미디는 사람을 단순히 웃기는 것이 아니고 메시지가 있어야 해요. 웃음 가운데 진실이 우러나오는 게 코미디입니다. 그래서 찰리 채플린이 오래도록 인기가 있는 거 아닙니까? 영화 볼 때는 웃다가도 집에 돌아갈 때 눈물이 나오는 거죠. 사실 웃음을 끌어내는 희극과 눈물을 뿌리게 하는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에요. 눈물을 알지 못하면 웃음 또한 알 수 없죠. 만날 까르륵 까르륵 말초적으로만 웃기는 게 코미디가 아닙니다. 눈물 스민 웃음을 끌어내는 것이 진짜 코미디죠. 그러니까 코미디언은 보는 사람을 깨우쳐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인 거예요. 이게 생명이죠."

"이 때까지 늙었다는 생각 안 하고 살았어요. 왜냐하면 내 마음이 젊으니까. 후배들을 오랜만에 만날 때 한 번씩 같이 늙어가는구나 할 뿐이죠. 나이가 드니까 힘이 달려 못하는 일이 생기긴 하지만, 그 외에는 다 할 수 있어요. 다만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오늘 죽더라도 후회를 남기지 말자 그래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약속을 꼭 지키세요. 그리고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두 마디면 세상에 다툴 일이 크게 줄어든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또 나로 인해, 내가 하는 일로 인해 상처 받는 사람이 없나 잘 살피면서 살아야죠."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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