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노동자 압박.. '칼' 쥐여주는 정부

정원식 기자 2016. 1. 2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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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3번째 해고 카드’ 양대지침에 더 커지는 고용 불안

노명래 HMC투자증권 과장은 2011년 6월 경력직 사원으로 입사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08년 2월 신흥증권을 인수했다. 현대차그룹이 증권업에 진출하면서 증권업계에 스카우트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실제로 HMC투자증권으로 이름을 바꾼 신흥증권은 300여명이던 직원이 2011년에는 3배 가까이 늘었다. 노 과장이 대우증권에서 HMC투자증권으로 옮긴 것이 이 무렵이다. 노 과장은 “현대차 위상에 걸맞은 증권사를 만든다면서 타사에서 우수사원들을 뽑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사내에서 ‘저성과자’로 분류된다. 태블릿PC 등을 활용해 외부에서 증권상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방문판매조직인 ODS(Outdoor Sales: 외부영업조직) 부서에서 일한다.

2013년 4월 방문판매로 구매한 증권상품 청약을 고객이 철회할 수 없도록 하는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다. HMC투자증권은 개정안 논의 움직임에 맞춰 2014년 9월1일자로 직원 20명을 ODS부서로 배치했다.

회사는 ODS부서 신설 목적이 ‘업무환경 변화 대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선정 기준은 ‘저성과자들’이었다. 영업직원의 경우 ‘반기 영업실적 기준 하위 25% 이내 영업목표 달성률 70% 미만’, 본사 직원은 ‘최근 3개년 인사평가 평균 B등급 미만, 최근 2년 내 징계 받은 직원, 장기 승진누락 직원, 필수 자격증 미취득 직원, 근무태도 불량 직원’이 대상이었다. 회사는 ODS부서 배치 대상으로 1차에 88명을 선정하고, 최종적으로 20명을 확정 배치했다. 회사는 지방노동위원회 심문에서 “희망퇴직 실시 후 남은 사람들로 순위를 정했고, 88명 중 20명을 선정한 사유는 지점장, 지역본부장 등의 의견에 따라 정해졌다”고 밝혔다. 20명 중 17명이 2014년 4월 설립된 HMC노동조합 조합원이었다. 노 과장은 민주노총 사무금융노조 HMC투자증권지부장이다.

노조는 ODS부서가 희망퇴직을 거부한 이들을 퇴출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회사는 2014년 7월 경영효율화 조치 실행 계획이 담긴 메시지를 발송했다.

같은 해 7월15일부터 25일까지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임직원 940여명 중 252명이 퇴사했다. HMC투자증권 노조가 확보한 녹취록에 따르면, 이 무렵 한 지점장은 회의실에서 사장 지시사항을 전달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이 프로그램(저성과자 프로그램)을 잘 견딜 수 있으면 잘 견뎌라. 대신 앞으로 희망퇴직금 이런 것은 전혀 없다.” 지방노동위원회는 부당한 배치전환과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정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부당노동행위만 인정했다. 지난해 11월 서울행정법원은 둘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노조는 항소했다.

최근 노 과장의 불안은 더 커졌다. 지난 22일 고용노동부가 근무성적 부진을 통상해고 사유에 포함시킨 ‘공정인사 지침’(‘지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지침에 따르면, “업무능력의 결여, 근무성적 부진 등은 업무명령 위반, 비위행위 등 별도의 징계사유가 없더라도” 통상해고 사유가 될 수 있고, 그 사유가 “사회통념상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임을 충족하면 해고 정당성이 인정된다. 노무법인 나무의 김현수 노무사는 “HMC투자증권의 경우 저성과자들을 대기발령하지 않은 것은 법적 부담이 있기 때문인데, 정부 지침은 기업에 저성과를 이유로 대기발령을 내고 해고를 해도 괜찮다는 신호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 정부는 ‘지침’ 왜 만들었나

지침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졌다. 해고 요건과 절차, 관련 판례들을 상세히 정리했다. 노동부는 판례로 축적된 정당한 해고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법제도가 추상적으로만 규정하고 있는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통상해고 관련 고용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계는 ‘불확실성 해소’는 명분에 불과하다고 본다. 첫째, 법원은 이미 “사회통념상 근로계약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근로자에게 책임 있는 사유”라는 원칙을 세우고 부당해고에 대한 판례를 축적해왔다. 노동부 지침 형태의 별도의 구체적 기준이 필요하지 않다. 둘째, 노동계에서 문제 삼고 있는 저성과자 통상해고와 관련해, 법원은 저성과만을 이유로 한 해고의 정당성을 인정한 사례가 거의 없다. 민주노총이 2001년부터 2015년까지 노동위원회 해고구제신청에 대한 판정결과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3만5335건 가운데 저성과자 해고 사건은 전체의 4.7%에 불과했고, 정규직 저성과자 해고를 정당하다고 본 경우는 11건에 불과했다. 한 해 한 건도 안되는 수치다. 그럼에도 지침은 전체 170쪽 가운데 50쪽을 ‘업무능력 결여, 근무성적 부진 등을 이유로 한 통상해고’에 할애하고 있다. 셋째, 지침은 행정관청 내부 매뉴얼이다. ‘고용안정’이라는 관점에서 사용자를 법적으로 구속하는 효과가 없다. “(지침이) 법과 판례를 해설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불필요해서 무용하고, 법과 판례의 법리를 벗어나 보다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면 위법해서 무용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노동계는 정부가 저성과를 통상해고 사유로 규정함으로써, 기업이 퇴출 대상자를 저성과자로 포장해 퇴출하는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민주노총 법률원 차승현 변호사는 “판례를 보면 업무성과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해고하는 것은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며 “지침 자체가 규범적 효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정부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용자들이 노동자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는 가능한가

노동부는 “대다수 성실한 근로자는 통상해고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면서 저성과에 따른 통상해고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단체협약 및 취업규칙에 ‘업무능력 결여 등에 따른 통상해고’ 사유 명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 교육훈련 및 배치전환 등 고용유지 노력 등이다. 단협 및 취업규칙에 통상해고 사유를 명시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거쳐 저성과자를 선발한 다음, 교육훈련 및 배치전환으로 해고 회피 노력을 하면 해고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가 가능한지, ‘교육훈련과 배치전환’을 어디까지 해고 회피 노력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노동계는 ‘사용자에 의한 자의적 평가’와 ‘형식적 교육훈련 및 배치전환’이 정당화될 것을 우려한다.

현대라이프생명은 지난해 7월31일 ‘인력활용도 제고 및 조직효율성 향상을 위한 인력 재배치’ 명분으로 52명을 대상으로 인사발령을 냈다. 47명이 전보조치됐다. 이 가운데 17명은 인사담당자로부터 “귀하는 전 소속부서에서 잉여인력으로 분류돼 직급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회부여 차원에서 이동 발령되었다”는 e메일을 받았다. 회사는 잉여인력 선정기준이나 처리절차를 제시하지 않았다. 실제 선정된 이들은 근속연수 20년 이상 고연령자이거나 희망퇴직을 거부한 직원들이었다. 회사는 “새로운 기회부여”라고 했지만, 대부분 영업직 및 보험심사를 맡았던 이들 17명은 계리, 자산운용, IT 등 이전 업무와 무관한 전문직 및 기술직 부서로 발령나 실적평가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배치전환과 교육훈련은 해고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대신증권은 2012년 5월부터 3단계, 총 8개월 과정의 ‘전략적 성과관리 체계’를 운영했다. 각 단계별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프로그램 수행 기간이 길어졌다. 특히 3단계 프로그램은 명함 받아오기, 전단지 배포, 사내 도서관 도서 정리 등 성과 향상과는 무관한 업무를 지시하고 몇 주에서 몇 달 간격으로 인사이동을 하는 등 모멸감을 주는 방식으로 운용됐다. 노조파괴로 악명이 높았던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 설계한 이 전략적 성과관리 체계 문건에는 “설계는 육성이지만 목표는 퇴출인 상시적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노동부 지침은 평가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평가를 하는 경우 평가결과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고, 충분한 개선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이루어진 평가는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법원은 인사고과 평가는 사용자의 고유권한으로 상당한 재량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부당한 평가라는 점을 개별 노동자가 입증해야 한다. HMC투자증권, 현대라이프생명, 대신증권의 경우 노동조합이 이 역할을 했다. 대신증권은 노조 반발로 3차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던 모멸적 교육내용이 삭제됐다. 3차 프로그램 불합격 시 명령휴직(일정기간 후 자동해고)이 가능했던 규정도 폐지됐다. 지침은 평가기준 마련 시 노조, 노사협의회, 근로자대표의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를 두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한국의 노조조직률은 지난해 기준으로 10.3%에 불과하다. 노사협의회나 근로자대표는 협상력이 낮다. 다수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미 일부 노무법인들은 업무 분야의 하나로 ‘저성과자 관리’를 내세우고 있다. 한 노무법인은 홈페이지에서 “최근 우리나라 기업은 계속되는 인력 적체로 인해 효율적인 조직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특히 저성과자들의 출현은 무임승차 논란과 더불어 우수인재의 기회를 잠식하고 제한하기까지 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노동관계법상 문제될 수 있는 저성과자 관리 프로그램 실행에 있어 저희는 준비된 사례와 솔루션으로 안정적이고 확실한 관리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해주겠다는 것이다.

김기선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희망퇴직의 난점은 우수 인재도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저성과자 해고의 경우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력만 선별해서 내보낼 수 있다. 기업에선 인사관리 측면에서 저성과자 프로그램이 고려할 만한 대안이 된다”며 “대기업이 음성적으로 시도하고 있던 것을 공론화함으로써 저성과를 명분으로 노동자를 해고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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