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임대료의 역습]① 무권리화로 권리금까지 뜯겨..임차인 빠지고 상권 죽는 공멸 전주곡

전재호 기자 2016. 5. 9.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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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홍대 인근 상권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지역 중 하나다. 유동 인구가 늘면서 상가 임대료도 대폭 올랐다. /조선일보 DB
홍대입구역 주변의 한 건물이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다. 홍대 상권이 활성화되자 최근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해 새로운 임차인을 들이는 건물이 늘고 있다./전재호 기자
예쁜 옷 가게가 많아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이대 뒷골목. 지금은 상가 곳곳이 비어있다. /전재호 기자

권리금 없애 월세 높이는 ‘무권리화’로 새 임차인 구해
“동네 특색 사라지면 손님 줄어 결국 모두가 지는 게임”

젊은 예술가와 개성 있는 상가 점포들이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아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들 덕분에 동네에 생기가 돌고 상권이 뜨자 건물주는 임대료를 올리고 처음 터를 잡았던 사람들은 높아진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 현재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조선비즈가 젠트리피케이션의 현황과 문제점, 대안을 살펴봤다. [편집자 주]

영국의 금융 중심지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에서 북쪽으로 약 3㎞ 떨어진 혹스톤(Hoxton)은 1996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지(紙)가 전 세계에서 가장 ‘쿨(cool, 멋진)’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꼽은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엄청난 폭격을 받고 런던의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우범지대로 전락한 혹스톤을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만든 것은 젊은 예술가들이었다.

예술가들이 런던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혹스톤에 둥지를 틀면서 이 일대는 사회·예술의 중심축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사람이 몰리자 임대료가 치솟았고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예술가들은 하나둘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이들이 떠난 자리엔 주택 단지가 들어섰고 차츰 런던 직장인들을 위한 베드타운(bed town, 대도시 주변에 주거기능 위주로 형성된 도시)으로 전락하게 됐다.

사람들을 끌어당겼던 독특한 매력이 사라지자 혹스톤은 평범한 도시가 됐고 가게들도 떠나기 시작했다. 혹스톤은 일자리가 줄면서 현재 영국 내 624개 구(區) 가운데 11번째로 가난한 구로 남았다.

혹스톤처럼 낙후한 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외부 자본이 유입되고, 치솟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기존 주민과 상인들이 떠나는 현상(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과 마포구 홍대 상권, 강남구 신사동 로데오거리 및 가로수길 등이 대표적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1차 피해자는 거주지를 떠나야 하는 주민이나 임차인이다. 하지만 동네에 활기가 떨어지면 찾는 사람이 줄고 일자리가 감소해 결국 임차인, 건물 소유주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 4억원 투자했는데…“월세 올려주기 싫으면 나가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월세 900만원을 내고 횟집을 운영하고 있는 박석준(가명)씨는 얼마 전 건물주로부터 월세를 3000만원으로 올려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박씨가 과하다고 항의하자 건물주는 월세를 1800만원만 받겠다고 했다. 현재 이 건물은 리모델링 중이다. 인근 공인중개업소에 따르면 이 건물주는 임차인을 모두 나가게 한 뒤 건물을 통째로 유명 기업에 임대할 생각이라고 한다.

횟집이 있는 서교동은 홍대 상권이 뜨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장소 중 하나다. 박씨는 월세를 올려주거나 권리금과 시설 투자비를 모두 포기하고 떠나야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박씨가 이 가게를 얻기 위해 투자한 금액은 권리금 4000만원을 포함해 총 4억원. 그는 “월세를 올려 주면 남는 게 없다”며 “시설 투자금을 일부라도 회수하기 위해 협상 중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서울 홍대나 이태원, 가로수길 등 유명 상권 주변에는 박씨처럼 치솟은 임대료 때문에 고민하는 임차인이 많다. 이들 중 일부는 월세를 올려주고 장사를 계속하지만, 일부는 사실상 내쫓기게 된다.

김수금(가명)씨는 1995년에 권리금 1억3500만원을 주고 종로구 청진동에 가게를 얻은 뒤 보증금 6500만원에 월세 320만원을 내고 식당을 꾸려왔다. 그러나 주변에 대형 오피스 빌딩이 준공되고 직장인이 늘자 건물주는 보증금 1억원에 월세 650만원으로 올리거나 가게를 비워 달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권리금을 회수하기 위해 새로운 임차인을 찾아봤지만 임대료가 시세보다 비싼 탓에 들어오겠다는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앞서 건물주는 월세 300만원이던 옆 가게 임차인도 내보낸 뒤 두 가게를 하나로 터 새 임차인으로부터 보증금 2억원에 월세 1600만원을 받고 있다. 김씨는 “가게 앞에서 시위까지 해 비용을 일부 보전받을 수 있었지만, 단골이 많은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니 막막할 따름”이라고 했다.

◆ 건물주가 권리금을 가로채는 ‘무권리화’ 작업 확산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최근 인기 상권에서는 임차인이 받아야 할 권리금을 건물주가 월세로 가져가는 이른바 ‘무권리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권리금 시세가 1억원이고 월세가 200만원인 가게가 있다면 건물주가 임차인을 내보내 권리금을 못 받게 한 뒤 새로 들어오는 임차인에게 월세를 500만원 받는 식이다. 새 임차인은 월세가 비싸도 권리금이 없기 때문에 입주하는 경우가 있다.

무권리화 작업은 스타벅스와 같은 유명 프랜차이즈가 가게를 얻을 때 주로 쓰는 방법이다. 프랜차이즈 업체는 월세를 비싸게 주더라도 장사가 되는 지역을 찾고, 건물주는 유명 프랜차이즈가 들어오면 건물 가치가 상승한다고 믿기 때문에 유명 프랜차이즈를 들이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기존 임차인을 내보낸다. 실제 스타벅스는 700여개의 가게를 얻으면서 권리금을 준 사례가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작구 상도동 대로변에서 보쌈집을 운영하던 김미경(가명)씨는 작년 9월 장사를 접었다. 스타벅스가 권리금을 내지 않는 대신 월세를 배 가까이 주겠다고 제안하자 건물주가 계약 기간 종료를 이유로 내보낸 것이다. 김씨는 2004년에 권리금 8000만원을 주고 가게를 얻었다. 한때 장사가 잘 돼 권리금 2억원을 줄 테니 가게를 넘기라는 제의도 있었다.

김씨는 소송을 한 끝에 건물주로부터 50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김씨는 “권리금 2억원을 준다는 제의까지 거절하고 열심히 일했는데 한 순간에 쫓겨나게 됐다”며 “비슷한 가게를 얻으려면 권리금 2억~3억원을 줘야 하는데 5000만원으로는 구할 수 있는 가게가 없어 아직 집에서 쉬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가 주로 쓰던 무권리화 작업이 최근에는 더욱 일반화됐다. 특히 인기 상권의 건물을 비싸게 매입한 건물주들이 주로 활용한다. 이들은 건물 가격의 70~80%까지 대출을 받는 경우가 있어 월세를 비싸게 받지 않으면 대출이자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원구 중계동에서 음식점을 하는 김영원(가명)씨도 2억1000만원의 권리금과 시설 투자비 5000만원을 떼일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새로운 건물주가 ‘임차인 간 계약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재계약을 하자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새 임차인에게 넘기지 못하면 권리금과 시설비는 그대로 물거품이 되는데 계약 후 건물주가 월세를 대폭 올리면 그냥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선민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맘상모) 조직국장은 “권리금은 임차인이 공들여 만든 무형 자산인데 무권리화 작업은 이 권리금을 건물주가 부당하게 가로채는 것”이라며 “임대료 폭등을 막고 권리금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콧대 높던 신촌·이대, 사람 떠난 뒤에야 임대료 인하

임차 상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된 맘상모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모두가 지는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월세를 2~3배 갑자기 올리면 건물주는 당장 이익을 보지만, 임차인이 떠나면 상권이 침체되고 빈 점포가 늘어나 건물주도 결국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신촌과 이대역 뒷골목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 부근인 서대문구 창천동 일대와 2호선 이대역이 있는 대현동 일대는 2000년대 초반까지 강북 지역 최고 상권 중 한 곳으로 꼽혔다. 그러나 몇년 전부터 지하철 홍대입구역, 합정역, 상수역이 있는 동교동과 서교동, 상수동에 밀려 ‘한물 간 상권’이란 평가를 받았다.

창천동과 대현동 상권이 몰락한 과정은 영국의 혹스톤과 비슷하다. 특색 있는 가게가 많았던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자 가게 주인들은 임대료를 올리기에 바빴다. 창천동 일대 공인중개사의 말을 종합하면 신촌의 상가 임대료는 2000년대 초반 몇 년 사이에 2배 이상 올랐다. 보증금 8000만원에 월세 100만원이던 상가가 재계약 때 보증금 1억원에 월세 200만원으로 오르는 식이다. 임대료가 오르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가 들어왔고 예전 손님들은 떠났다.

아기자기한 옷 가게로 유명했던 ‘이대 뒷골목(신촌동 주민센터에서 이화여대 정문까지 이어지는 골목)’은 한때 10㎡ 크기의 상가의 경우 권리금이 1억원을 웃돌 정도였으나 지금은 곳곳에 빈 상가 점포들이 늘고 있다. 경의선 신촌역과 이대 정문, 이대역으로 연결되는 ‘ㄱ’ 모양의 대로변에만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대형 가게가 즐비한 정도다.

손님이 끊기자 건물주들은 결국 뒤늦게 임대료를 내리고 상권 살리기에 나섰다. 신촌번영회와 신촌 지역 건물주 9명은 2014년 2월 임대료 안정화 협약을 맺었고 작년 9월엔 이대 뒷골목 건물주 18명이 임대차 계약 기간에 보증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한 번 침체된 상권은 좀처럼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말 둘러본 이대 뒷골목 상가는 아직도 여러 곳이 비어있었다. 일부 음식점은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손님이 많았지만 전반적으로는 한산했다.

선종필 상가뉴스레이다 대표는 “독특한 문화로 성장한 상권은 그 문화를 잃으면 힘이 빠지는 경우가 있다”며 “높은 임대료를 고집하다가 독특한 개성을 잃어버리면, 임차인이나 건물주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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