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그룹 '책사의 시대'가 저문다

2016. 9. 1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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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기업 역사에 입지전적 인물들… 규모 커지면서 가신형 측근 점점 사라져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충고를 듣지 않은 유비가 촉을 멸망의 길에 빠뜨린 것으로 나온다. 유비에게는 와룡(제갈량) 말고도 봉추 방통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말았다. 혹자들은 제갈량은 뛰어난 책사이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인이고, 군사전략은 방통이 나았다고도 한다. 방통이 살아 있었다면 유비가 대업을 이뤄냈을까. 정치나 기업경영이나 책사의 판단이 성패를 가를 수도 있다. 자신의 재능은 부족하더라도 책사를 잘 부리는 것 또한 주군의 능력이다. 주군이 신통찮거나 힘이 빠지면 때때로 가신들이 자신의 이익을 좇아 주군을 쥐락펴락한 경우도 더러 있다. 과하면 해롭고, 없으면 아쉬운 가신의 사례는 국내 재벌에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신동빈 롯데 회장이 8월 27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인원 정책본부장(부회장)의 빈소를 찾아가 오열했다. 그룹 총수가 직원 빈소에서 오열하는 건 보기 힘든 장면이다.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일본 문화에 익숙한 신 회장의 경우 더욱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유서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유서에는 “롯데그룹 비자금은 없다.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다. 2015년 초까지 모든 결정은 총괄회장(신격호)이 했다”고 적힌 것으로 전해졌다. ‘저문 해’ 신격호에게 책임을 돌리고 ‘새 태양’인 신동빈에게는 끝까지 선긋기를 해주고 간 셈이다. 주군을 지키려는 사무라이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잖다.

롯데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그룹 내 어른으로서 항상 중요한 사안을 총수에게 보고하는 위치에 있었다. 신 총괄회장도 꼭 이 부회장을 배석시켜 보고를 받곤 했다”고 밝혔다. 한·일 간 지배구조 개편이나 호텔롯데 기업공개 같은 산적한 과제 앞에 이 부회장의 부재는 변수다. 당장 대안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측근인 황각규 정책본부 사장, 소진세 정책본부 대외협력단장 등도 검찰 사정권 안에 있어서다.

오너의 복심, 일인지하 만인지상

국내 재벌 역사에는 눈에 띄는 입지전적 책사 또는 가신이 등장한다. 대표격은 이학수 전 삼성 전략기획실장(부회장)이 손꼽힌다. 책사들은 단지 경영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 오너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게 주업무로 보일 때가 있다. 유사시 방패, 총알받이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전 실장과 김인주 전 삼성 전략기획실 차장(사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발판을 놓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과 관련해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돼 2009년 8월 각각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5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충성의 대가는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대 연봉이다. 이학수처럼 1조원어치가 넘는 주식(삼성SDS 320만여주)을 받기도 한다.

창업자인 정주영 명예회장 시절 옛 현대그룹 가신들도 한 획을 그었다. 대표 인물은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나 김윤규 전 현대아산 사장이다. 롯데, 효성의 경우도 그런 측면이 있듯 ‘형제의 난’ 뒤에는 가신들이 있다. 현대가 형제의 난의 도화선은 이 전 회장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는 정몽헌 현대그룹 전 회장의 오른팔이기도 했다. 2000년 봄 왕자의 난 당시 정몽헌 회장이 이 전 회장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쪽 계열사로 인사를 내자, 정몽구 회장이 내쳐버렸다. 이에 경영권 분쟁이 점화됐고, 두 형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때 기억 탓인지 정몽구 회장은 가신이나 책사에 의존하는 방식을 지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회장이라도 인사를 자주 해 2인자를 키우지 않는다. 2003년 현대차 부회장에 오른 김동진 전 부회장은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현대차 비자금 사태로 정 회장이 자리를 비웠을 때도 경영을 맡았다. 그러나 2009년 김 전 부회장은 계열사인 현대모비스로 자리를 옮겨갔다. 현재 실세라는 김용환 기획조정실 부회장이나 양웅철 연구개발총괄본부장 등 9명의 부회장 모두 실무형으로 평가된다. 현대차 관계자는 “지금 그룹에는 가신이나 복심, 오른팔, 누구 라인이라는 말이 없다”며 “부회장도 업무 파트별로 나눠져 있고, 중요 안건은 경영전략회의나 해외법인장회의를 거쳐 정 회장이 결정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는 다른 한편 정의선 부회장의 역할 확대와도 관련이 있다.

조언자는 필요하지만 책사는 옛말

이학수, 이인원 같은 책사형 측근은 점점 옛말이 되고 있다. 창업기나 2세대 급성장기에는 이런 방식이 먹혀들었지만 이제 규모가 커서 한두 명 책사에 의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또 공정거래법이나 상법 등 관계 법령 강화로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따위를 노리는 책사들의 역할이 줄었다. 자연스레 이사회 중심의 계열사 자율·책임경영이 강화되는 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덧붙여 오너가 2·3세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가신의 입지도 약해지고 있다.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도 주요 변수다.

LG그룹의 경우 근래에는 책사, 가신 같은 인물조차 떠올리기 쉽잖은 분위기다. LG의 대표 책사로는 2012년 LG 경영개발원 부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강유식 부회장이 꼽힌다. 2003년 주요 그룹 중 처음 지주회사 체제를 만드는 등 굵직한 작업을 이끌었다. 구씨와 허씨가 양분해온 그룹을 LG, GS로 분리하는 데도 기여했다. 스마트폰 혁명의 충격에 빠진 LG전자에 구원투수로 구 회장의 동생 구본준 부회장이 전면에 나선 것은 대비되는 장면이다. 구 부회장은 2015년 지주사로 자리를 옮겼다. 에너지·자동차전장을 포함한 신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이다. 책사가 아니라 오너 일가가 지휘봉을 직접 잡는 최근 흐름을 보여준다.

신세계도 그룹 성장을 주도해온 구학서 전 회장이 2014년 12월 인사를 통해 일선에서 물러나고 세대교체를 했다. 정용진 부회장이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물갈이한 것이다. CJ는 외부 가신이 아니라 친척이 역할을 하고 있다. 이재현 회장의 외삼촌인 손경식 CJ 회장이 그룹 경영위원회를 이끌고 있다.

특히 지주회사 체제로의 개편은 책사 역할이 크게 줄어들게 하는 요인이다. SK도 2015년 8월 ㈜SK를 필두로 한 지주사 체제로 전환했다. 급성장하던 시기에 핵심 브레인은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이었다. 최종현 전 회장 사망 후 1998년부터 2004년까지 회장에 올라 최태원으로 바통을 넘기기까지 수장이었다. 지금 SK그룹은 수펙스추구협의회라는 집단지도체제 형식이다. 그룹 측은 “측근 한두 명에게 좌우되는 구조가 아니다”라며 “손길승 회장 때와 달리 지금은 측근보다 전문경영인의 판단이 더 중시되는 때”라고 밝혔다.

그룹의 덩치가 글로벌 수준으로 커지면서 전체를 혼자 아우르는 데는 한계를 보인다. 삼성의 경우만 해도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은 이학수 전 부회장과 급이 다르다. 삼성 안팎에서는 “2013년 즈음해 숨가쁘게 진행돼온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작업 등이 최 실장의 작품은 아닌 것 같다”고 평한다. 최 실장이 ‘이재용의 가정교사’로 일컬어졌으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는 확실치 않다. 삼성 임원은 “이 전 실장은 그룹 전체 살림을 이끌었다면, 최 실장 때는 그룹 중복사업 등을 조율하되 인사 등은 역할별로 나눠진 게 다르다”며 “사람 중심이 아니라 역할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구 방식이 섞여 혼란스러운 장면이 목격된다. 경제개혁연대 김상조 소장(한신대 교수)은 “최지성 체제의 문제는 법적 실체가 없는 조직이라는 점”이라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논란 때 공식창구는 김신 사장이었으나 의사결정은 사실 미래전략실에서 하면서 정보가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외국인투자자가 김 사장을 만나서 장기투자를 하는 일반 연기금과 투기성 헤지펀드를 구분해 연기금에는 신뢰를 보여달라고 요청했으나 전달이 제대로 안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미래전략실은 해외투자자를 모두 한 패로 취급했고 결국 연기금까지 돌아섰다”고 밝혔다. 미래전략실을 공식 조직으로 바꿔 의사결정에 권한과 책임을 함께 지며 차라리 전면에 나서라는 요구다. 이렇게 되려면 삼성이 지주사로 전환돼야 하는 묵은 과제가 있다.

긍정적 의미에서 재계에 조율자 역할은 필요하다는 견해도 많다. 비유컨대 구단주·감독(오너)과 주전선수(가신)의 개인기에 의지하는 축구는 이제 세계 무대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미 축구의 무게중심은 시스템화된 조직력에 바탕한 압박축구로 가 있다. 다만 선수들을 조율하고 게임을 이끄는 지네딘 지단(프랑스) 같은 플레이 메이커 역할은 분명 중요하다. 판 전체를 읽고 감독까지 움직이는 진정한 플레이 메이커가 아쉬운 게 국내 재벌그룹의 현실이다.

<전병역 기자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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