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전 오늘..열 여덟 유관순 투옥中 눈감아

이재윤 기자 2016. 9. 28.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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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가혹한 고문에도 '대한 독립' 유관순 열사 순국

[머니투데이 이재윤 기자] [[역사 속 오늘]가혹한 고문에도 '대한 독립' 유관순 열사 순국]

유관순 열사가 96년 전 오늘(1920년 9월 28일) 옥고를 치르다 숨을 거뒀다. / 사진제공 =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96년 전 오늘(1920년 9월28일) 오전 8시 수감번호 371번 유관순 열사는 유언을 남기고 서울 서대문형무소(당시 경기도)에서 눈을 감았다.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에도 마지막까지 '대한 독립'을 외친 유관순은 열 여덟 꽃 다운 나이였다.

가혹한 고문으로 그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고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였다. 그해 4월 대한제국 영친왕의 결혼 특사로 형량이 줄었지만 유관순은 결국 햇빛을 보지 못하고 수감 1년 만에 옥중에서 최후를 맞았다.

소녀 유관순은 그해 3월 1일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일 정도로 강했다. 그는 1년 전 '3·1 만세운동'과 4월 1일(음력 3월 1일) 고향인 천안(당시 충청남도 목천군) '아우내 만세운동'에 주도·가담하면서 옥고를 치렀다. 당시 고향에서 벌인 만세 운동으로 그는 눈 앞에서 부모를 잃었다.

그는 고문을 겪으며 재판을 받으면서도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일제)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계몽운동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4살 때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한 유관순은 3년 뒤 고등부 1학년으로 진학하면서 동료들과 '5인 결사대' 등을 만들어 본격 독립운동을 벌였다. 당시 고종(1919년 1월)이 서거하면서 전국적인 독립운동에 불씨를 붙였었다.

고문으로 짧은 생을 마친 유관순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만행을 숨기려는 일제로 인해 고통받았다. 유관순의 시신 인도 요구를 거부했던 일제는 해외 언론에 사망 소식을 알리겠다는 이화학당 교장의 말에 '장례를 조용히 치뤄야 한다'는 조건으로 시신을 인도했다.

숨을 거둔지 보름도 넘어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돌아왔다.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많은 학생들의 통곡 속에 조촐한 장례가 치러졌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시신이 사라지는 일까지 겪었다. 1930년대 일제가 이 공동묘지를 군부지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무연고묘 처리됐고 50여년 뒤 고향에 가묘가 세워졌다.

3남 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짧은 생을 마감한 유관순은 우리 국민들의 기억 속에 '영원한 누나·언니'로 남았다. 그는 숨을 거둔지 20년이 지난 1951년에야 순국열사로 인정됐고 그 후로부터 또 10년 뒤인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받았다.

이재윤 기자 m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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