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해고가 쉬워졌다'는 주장은 선동이다

박종세 사회정책부장 2015. 9. 2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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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 대타협으로 정말 직장에서 해고가 쉬워졌는지가 쟁점이 되고 있다. 노사정 합의문이 서명되자 민주노총은 "사용자 멋대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며 삭발 투쟁에 들어갔다. 반면 사용자를 대표하는 경제 5단체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노동 개혁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라며 "국회를 상대로 입법 청원을 하겠다"고 반발했다. 같은 사안을 놓고 노사가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노사정 일반 해고 조항은 '근로계약 체결 및 해지의 기준과 절차를 법과 판례에 따라 명확히 한다'고 돼있다. 결국 노동 유연성이 높아졌는지, 바꿔 말해 고용과 해고가 쉬워졌는지는 현행법과 판례가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노사정이 협의해서 만들겠다는 정부 지침은 그저 현행법과 판례를 정리해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경영진은 그동안 우리나라의 법과 판례가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고를 제한하고 있다고 불만을 가져왔다. 근로기준법은 '정당한 이유 없이 근로자를 해고할 수 없다'고 돼있는데 어떤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규정이 없다. 업무 성과가 저조하거나 비위를 저지른 경우에도 법원은 좀처럼 해고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법원에서 정당한 해고라고 인정한 경우는 회사가 공정한 인사 평가의 기준을 마련하고 집행해야 하며, 직원이 최하위 등급을 받더라도 개선할 기회를 충분히 보장해야 하고, 그런데도 개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빠져도 정당한 해고로 인정되지 않는 판례가 정립돼 있다. 이런 엄격한 고용 보호 법제 때문에 정규직의 개별 해고가 쉬운 정도를 재는 지표에서 우리나라는 OECD 34개국 가운데 23위다.

이는 개별 해고가 자유로운 미국과 비교하면 극명하게 대비된다. 미국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상당수는 근로계약서가 아예 없다. 그래서 임의 고용 및 해고가 가능하다. 업무 저성과자, 상사 명령 불복종자는 물론이고 그저 그 일이 더 이상 필요 없으면 해고한다. 아침에 출근한 직원에게 '당신, 해고됐어(You're fired)'라고 말하면 바로 짐을 싸야 하고, 밤 12시에 이메일로 해고 통지를 하기도 한다. 미국에선 성·나이·인종 등에 따른 차별을 제외하곤 어떤 경우에도 쉽게 해고할 수 있지만 대신 고용도 그만큼 자유롭다.

이번 노사정 합의에 '일반 해고'라는 금기 단어가 포함되긴 했지만 상징적 의미일 뿐 경영계가 바라는 노동 유연성 확보와는 거리가 멀다. 다만 어떤 경우에 해고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지침이 마련되면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혜택을 볼 수 있다.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에선 해고와 관련된 법 조항을 근로자들이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고, 사용자들이 불법 해고를 서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앙노동위원회에 따르면 부당 해고 구제 신청 가운데 35% 정도가 부당 해고라는 판정을 받는데, 대부분이 이름 없는 중소기업이다. 해고 기준을 정부 지침으로 분명히 해두면 회사가 부당하게 해고하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고, 노동위원회의 판정도 훨씬 빨라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반 해고는 이번 노사정 합의로 결코 쉬워지지 않았다. '쉬운 해고'라는 프레임은 그래서 선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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