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박근혜의 사부곡(思父曲)

김민아 논설위원 2015. 10. 1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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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일컬어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했다. 박근혜 정권을 떠받치는 인사들은 이런 식으로 밑도 끝도 없이 ‘노무현’을 소환한다. 세상 뜬 지 6년이 넘은 전직 대통령을 틈만 나면 불러내 괴롭힌다. 시민적 상식도, 인간적 예의도 없는 이들이다.

한때 박근혜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신당 국민통합21을 창당한 정몽준 후보가 한국미래연합 대표이던 박 대통령에게 연대를 제의했다. 정 후보는 박 대통령과 손만 잡는다면 이회창·노무현 후보와 3파전을 벌여도 승산 있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거절했다. 강신옥 국민통합21 창당기획단장이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총을 겨눈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인이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박 대통령은 정 후보와의 회동 내내 강 단장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강 단장이 백의종군을 선언했으나 박 대통령은 변하지 않았다. ‘당초 그런 인물을 중용했던 정 후보의 정체성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 후보는 노 후보와의 단일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박 대통령이 정 후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16대 대선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에게 ‘아버지’는 그런 의미다. 존재의 출발이요, 지향이요, 종착이다. 2012년 대선 전 새누리당 친박근혜계 핵심인 김재원 의원이 “박근혜 후보가 정치를 하는 건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발언을 해 설화를 빚은 적이 있다. 당사자가 부인하는 바람에 유야무야됐지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2013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 통과는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버림) 작업의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이념을 따지기조차 사치스러울 만큼 오류투성이인 책이 나오고 말았다. 결과는 채택률 0%대의 참패였다. 검정제로는 힘들겠다고 본 박 대통령은 지난해 2월 ‘교시’를 내린다. “균형 잡힌 역사교과서 개발 등 제도 개선책을 마련하라.” 세월호 참사와 성완종 리스트 의혹, 메르스 사태만 없었다면 역사교과서는 이미 국정화되고도 남았을 터다.

정부가 마침내 ‘거사’를 결행했다. 어제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공식 발표했다. ‘박정희 탄신 100주년’인 2017년에는 교학사 교과서의 ‘박근혜 버전’이 전국의 교실에 등장할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직후 근현대사 부분을 읽어본 적이 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제2공화국 수립 과정을 모두 합친 것보다 단일 사안인 새마을운동이 더 길게 소개돼 있었다. 검정이 이럴진대 국정으로 전환된다면? 5·16 군사정변은 “구국의 혁명”(2007년 박 대통령 발언)이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2012년 박 대통령 발언)으로, 10월 유신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달성할 정치, 사회 풍토를 조성하고자 헌법을 개정”(1979년 고교 국사 교과서)한 일로 바뀔 수도 있다. ‘통합’ 교과서로 부르든, ‘올바른’ 교과서로 포장하든 본질이 달라질 리 없다.

박 대통령이 ‘퇴임 이후’에 유난히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아버지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박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배신’이다.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유신 때는 ‘유신만이 살 길’이라고 떠들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인생의 서글픔이 밀려왔다.”(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박 대통령은 권력을 놓는 순간 자신이 배신당하는 것은 물론 온 힘을 다해 복권시킨 ‘박정희 레거시(legacy·유산)’가 뒷방에 처박힐까 두려운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를 영원불멸로 만드는 길은 퇴임 이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최소한 사랑하는 장조카(10세)가 성장해 ‘가업’을 이어받는 그날까지는.

자식은 부모를 넘어서야 어른이 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어른이 될 생각도, 의지도 없다. 오히려 21세기 대한민국을 해체해 1970년대 ‘아버지의 나라’로 재조립하는 게 목표인 것 같다. 최근 정부 고위관계자에게 과거의 유물인 국정교과서를 왜 부활시키려 하는지 물었다.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정말 그 이유를 모르세요?” ‘그분’의 뜻이라는 얘기로 들렸다.

박 대통령은 오늘 미국에 간다. 방미 둘째날 미항공우주국(NASA)의 고다드 우주비행센터를 찾는다. 박 대통령의 NASA 방문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두 번째다. 50년 전 NASA에 간 첫 번째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박근혜의 기억투쟁’은 이렇게 계속된다. 그의 투쟁이 성과를 거둘수록 시민은 불행해지고, 공동체는 위험해진다. 멈춰야 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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