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수의 사람그물] 이걸 하면 된다

2016. 3. 2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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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평생 술을 한잔도 입에 대지 못하는 체질인데 음주운전 의심을 받은 적이 있다. 심정적으론 피식 웃어넘기고 말 일이었지만 만일 법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면 내가 음주운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일이 쉽진 않겠구나 그때 느꼈다. 진실이 명확해도 그걸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일은 어렵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700쪽의 책이다. 그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구할 수 있었다’이다. 수백만명의 시민이 살아 있는 목숨들이 수장당하는 현장을 지켜봤다. 그 끔찍한 고통과 기억에서 선연한 건 구할 수 있었던 게 확실한데 왜 구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답은 간단명료한데 그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음모론에 끌리게 되고 감정적 과잉상태가 지속된다.

사람들의 그런 불안과 공포를 덜어내고 진상규명의 토대를 마련한 기록의 집대성이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다. 세월호 안에서 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동영상을 발견한 아버지는 이것을 아이가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숙제로 생각했고 세월호에 대한 기록을 미친 사람처럼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 일의 시작이었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은 구할 수 있었는데 왜 구하지 못했는지와 누구의 책임인지를 담담하고 소상하게 밝힌다. 15만쪽, 3테라바이트(약 3000기가바이트) 분량의 자료를 검토하고 분석한 결과물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베테랑 기자, 시민활동가, 젊은 작가, 변호사 등 8명이 지난 10개월 동안 합숙하며 힘을 합쳐 이뤄낸 성과다.

이런 일에는 말하기 힘든 고통이 수반된다. 기록만으론 다 표현할 수 없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오롯이 견뎌야 하고 무책임한 구조세력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다스려야 하며 내가 하는 일이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무기력감을 순간순간 떨쳐내야 한다.

세월호 희생자의 부모 형제들은 핏줄들의 마지막 순간이 연상돼 이런 기록들을 보고 듣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대신 읽고 집단기억의 힘으로 또 다른 형태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 당연히 그 과정이 쉽지는 않다. 희생자와 가족들, 기록자들과 비슷한 고통을 견뎌내야 해서다. 그래도 책을 펼쳐야 한다. 이런 사회적 참사에서 시민사회가 감당해야 할 기억의 의무다. 공화국 시민의 의무인 동시에 이웃의 역할이다.

지금 책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한 권씩 서가에 보관하기라도 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국면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무기력감에 빠질 때, 이걸 하면 된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군사정권 아래서 간첩으로 조작되었다가 수십 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밝혀내고 손해배상 재판을 통해 국가 책임을 추궁하는 데 성공한 생존자들이 만든 단체다. 진실을 밝히는 일이 얼마나 험난하고 끈질겨야 하는지 잘 아는 동시에 진실을 밝히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곳에서 만든 기록물이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다.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은 10개월 동안 어디에도 말하지 못한 채 독립운동하듯 자료를 모으고 팔만대장경을 목각하듯 자료들을 정제했다. 그 과정을 숨죽여 지켜봤고 전해 들었고 기도했고 응원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세월호에 관한 기억과 기록의 투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런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을 보내달라.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읽거나 보관하는 일은 세월호 진실의 촛불 하나를 켜는 일이다. 그 촛불들이 무수히 많아지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횃불이 된다. 그러면 진실이 가진 힘이 우리를 부축하고 선동해서 결국 이길 것이다. 지금, 이걸 하면 된다.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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