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적 가해자?

2016. 5. 2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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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포르노그래피>, 안드레아 드워킨 지음, 유혜연 옮김
동문선, 1996

‘군 위안부’ 운동에도 참여한 세계적인 인권운동가 샬럿 번치 미국 럿거스 대학 교수는, 사회가 성차별과 여성 살인(femi/cide)을 당연시하는 이유는 “너무 많아서 손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피해자는 여성의 성역할 중 하나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생각하거나 지나치게 놀라는데, 실상 원인은 같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이번 서울 강남역 사건이 ‘낯설었다’. 매일, 아니 몇 분마다 일어나는 일을 몰랐단 말인가. 성차별은 가장 광범위하고 심각한 문제지만 너무 만연해서 정치로 간주되지 않는 특이한 정치학이다.

장동민씨의 “여자들 머리 멍청”, “참을 수 없는 처녀 아닌 여자” 유의 발언부터 강남역 살인까지 공통점은 무엇일까. 수천 년간 일상 문화였던 여성 혐오(misogyny)가 여성들의 대응으로 갑자기 뉴스가 되었다는 점이다. 여성 혐오는 인류 문명의 가장 강력한 그리고 독자적인 문화적 기반이다. ‘인종 역할’, ‘계급 역할’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성역할(gender role)이란 말이 널리 쓰이는 것은 성차별이 부정의가 아니라 지켜야 할 규범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차별은 심한데 인식이 낮은 사회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다. 남성의 자연스런 일상이 여성에게는 황당, 모욕, 차별, 생명 위협이다. 남성은 자신의 행동에 대응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행복권 침해’로 생각하고 증오와 피해의식을 갖기 쉽다. 얼마 전 남자 동창이 여성의 고시 합격률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기에, “너는 오바마가 목화 농장에서 일하지 않는 게 불만이겠구나, 세상이 변한 게 아니라 네가 안 변한 거야”라고 말하는 바람에 나는 ‘가해자’가 되었다. 인권, 평등, 사회의식 전반에 있어서 남성들의 문화 지체 현상은 ‘국가경쟁력’은 물론 개인 차원에서도 경쟁력을 잃은 지 오래다. 저출산(비혼 여성 증가)이 대표적 결과다.

사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사건은 “나도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라는 ‘운동’이다. 잠재적 가해자라니?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면, 여성의 현실적, 현재적, 일상적 피해는 누가 저지른 일이란 말인가. 물론 ‘선의’겠지만 무지에서 나온 선의는 지배 세력의 관용과 성찰로 둔갑하기 쉽다. 사회적 모순에 ‘잠재’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빈부 격차를 ‘잠재적’이라고 하는가? 지역 차별, 장애인 차별도 일상적이고 노골적이지 잠재되어 있지 않다. 성차별은 더욱 그렇다.

나는 얼마 전 ‘참자아’, ‘라깡 정신분석’, ‘마인드 코칭’ 등 자칭 힐링 전문가 남성 세 명이 각각 수 명에서 십 수 명의 여성들을 상대로 저지른 성폭행, 동영상 촬영, 감정/성/금전 착취 사건과 관련, 실명 공개를 요구한 적이 있다. 피해 여성들의 진술과 고소 내용은 일상의 성별 권력 관계, 즉 잠재적 가해를 압축하고 있다. 고로, “나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는 “나는 성차별 구조에서 가해자의 위치에 있습니다”로 바꿔야 한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서구의 급진주의(radical) 페미니즘 사상은 급진적(急進的)이라기보다 발본적(拔本的)이라는 뜻이다. 이 사상은 사적인 영역,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되었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치적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공/사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가부장제의 근본 뿌리를 이론화했다는 뜻이다. 이후 본질주의라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건너뛰고서는 여성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의 몸을 통제, 지배, 착취한다는 사실이 이들의 노력으로 증명되었다. 성역할, 이성애, 결혼제도, 성/인신매매, 성폭력, 살인의 연속선이 밝혀진 것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작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그래피-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은 과소평가된 고전이다. 이 책은 ‘잠재적 가해=일상적 폭력’의 내용과 구조, 역사를 파헤친다. 서양사의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제2의 성>에 비견할 만하다. 내가 처음 여성학을 공부할 때 외워버린 책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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