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고분 서너개 파보고 "왜의 땅" 못박은 야쓰이

2016. 7. 2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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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17~1918년 나주 반남고분 발굴 전말
남도를 왜의 땅으로 단정, 임나일본부 왜곡 씨앗 뿌렸다

1917년 야쓰이 조사단이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발굴한 5세기께 금동관. 백제권 유적에서 유일하게 완형을 갖춘 채 나온 금동관이다. 제작지가 백제인지 마한인지를 놓고 학계의 견해가 엇갈리는 유물이다.
1917~18년 나주 반남고분 발굴 당시 신촌리 9호분에서 나온 대형 옹관과 토기들.

“고약한 날씨군. 제대로 유적을 조사할 수 있을까.”

1917년 12월18일 눈발이 세차게 휘날리는 전남 영산강 기슭의 나주 들녘을 일본인 세 명이 서성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날 나주에 도착해 반남면 사무소에서 새우잠을 잔 이들은 역사학자 야쓰이 세이이쓰와 측량기사 오가와 게이키치, 화가 오바 쓰네키치였다. 조선총독부의 2차연도 고적조사사업의 하나로 영산강 일대 고분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온 터였다. 원래 우두머리였던 세키노 다다시 도쿄제국대학 교수가 빠져 조사는 야쓰이가 총괄 책임을 맡았다. 일행은 눈보라 속 벌판을 둘러보았다. 반남면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의 너른 들판에 크고 작은 고분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네모진 모양새가 도드라진 고분 하나를 주시한 야쓰이가 말했다. “저것부터 조사한다. 일단 실측한 뒤 발굴을 시작한다.”

오늘날 영산강변에 남은 마한시대 대표고분이자 백제권에서 유일한 완형 금동관이 출토된 신촌리 고분은 약 100년 전 이렇게 일본인들의 시선에 끌려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조사에 참여했던 오가와 게이키치의 수기를 보면, 조사단은 12월19일 외형을 실측해 고분 평면이 사각진 방형이라는 것을 파악한다. 그리고 20일부터 신촌리 9호분으로 명명한 고분의 굴착조사에 들어갔다. 26일까지 진행한 굴착 결과는 일행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봉분 중앙부 무덤 방에서 지역 지배세력이 관으로 쓴 10여개의 옹관과 부장품 토기들이 발견됐는데, 23일 ‘을옹관’이라고 이름 붙인 대형 옹관을 갈라보니 반짝이는 금동관과 큰칼, 창, 화살촉, 옥기류, 금동신발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금동관이 출토된 첫 사례로,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나온 신라금관보다 4년이나 앞선 발견이었다. 외관과 내관으로 이뤄진 금동관은 매우 정교했다. 관대 테두리에 풀꽃 모양의 세움장식 3개를 꽂았고 내관은 반원형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어졌다. 신라 금관과 모양새는 비슷하지만, 세움장식이 신라 특유의 출(出)자 모양이 아닌 초화형이어서 영산강 유역 고대인들의 독특한 문화를 반영하는 걸작이었다. 다른 옹관에서는 부식된 인골과 큰칼, 화살촉 등도 확인됐다.

야쓰이는 당시까지 평양 일대 낙랑계 유적 조사에 몰두했지만, 진구왕후의 삼한 정벌과 임나일본부 등으로 대표되는 고대 일본의 조선남부 경영에 대한 흔적 찾기에도 부심하고 있었다. 남도의 반남고분에서 일본과 연관지을 만한 보물들이 나타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야쓰이는 장기조사를 하고 싶었지만, 폭설과 빈약한 조사예산 탓에 돈을 빌려가면서 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야쓰이 비망록 컬렉션에는 당시 그가 발굴도구와 비용을 관청 등에서 빌려 쓴 차용증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결국 비용 문제로 조사단은 9호분에 짚 가림막을 쳐놓고 27일 경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10월에야 다시 현장을 찾은 야쓰이 조사단은 임나일본부설의 왜곡된 기틀을 놓게 될 유물들을 찾아냈다. 신촌리 고분의 정상부와 가장자리에서 ‘하니와’라고 불리는 일본식 ‘원통형 토기’들이 줄줄이 열을 지어 출토된 것이다. 4~7세기 일본 고분시대 대형 무덤 봉분 외부를 장식한 전형적인 토기들과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 단연 주목됐다. 야쓰이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강역 삼은 직접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기뻐하며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917~18년 반남고분 발굴 당시의 유리건판 사진들이 남아 있는데, 신촌리 9호분 출토품 사진들이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해 그가 당시 얼마나 유물 발굴에 열광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야쓰이는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요약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고분들은 장법과 관계 유물로 추측하건대 아마도 왜인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주 반남의 왜인 유적’이란 제목의 특별보고로 제출하려 한다.”

야쓰이가 공언한 특별보고서는 1921년 그가 돌연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끝내 간행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2년에 걸친 반남고분 발굴의 결과물들은 20세기 초 일본 학계에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고고학적 기반을 마련하는 선구가 된다. 야쓰이는 3~4세기 일본 야마토 국가가 한반도 남부를 일종의 식민지처럼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과 진구왕후의 신라정벌설을 신봉하면서 당나라와 결탁한 신라의 배신으로 일본 품에서 떨어져나갔던 고토를 근대에 다시 찾게 됐다고 생각했다. 나주 반남고분 발굴을 통해 한반도 남부가 과거 왜의 땅이란 증거를 드디어 찾았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일부 교과서나 역사책에 실린 고대 한반도 지도를 보면 경상도 남부부터 전라도 서해안까지를 임나일본부 혹은 ‘가라’(야마토 국가와 가까웠던 한반도 남부 정권으로 국내 학계에선 가야연맹체 국가를 지칭한다)의 강역으로 표시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런 왜곡된 표기는 야쓰이 조사단의 나주고분 조사에서 그 맹아가 유래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정인성 영남대교수·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야쓰이 비망록이란?

정인성 교수가 지난해 일본에서 입수한 야쓰이의 조선 고적 조사 관련 문서 1만여점의 컬렉션. 1909년 첫 고적 조사 당시 답사일지와 촬영 목록, 각종 메모와 경비 영수증까지 포함돼 일제강점 초기 고적 조사의 세부를 살필 수 있는 일급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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