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팠던 익산 쌍릉은 판도라의 상자가 됐다

2016. 8. 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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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⑬ 익산 고분발굴

마한무덤으로 알고 팠던 쌍릉 조사 이제야 재조명
목관, 치아 등 주목할 만한 유물 나왔지만, 이후 외면당해
신라 고구려 유적 비해 유물양 적고
임나일본부 실증안돼 관심 시들
해방 뒤에도 심층조사 이어지지 못해

전북 익산 석왕동 쌍릉 중 대왕릉의 현재 모습.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7세기초 백제 무왕(?~641)이 도읍을 옮긴 곳이란 설이 종종 나오는 전북 익산 석왕동 숲속엔 세인들이 잘 모르는 왕릉급 무덤이 있다.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가 잠들었다고 전해져온 ‘쌍릉’(대왕묘, 소왕묘)이다.

올 1월말 국립전주박물관은 쌍릉이 무왕 생전에 선화공주 등의 다른 귀인들을 묻은 무덤일 가능성을 암시하는 연구성과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1917년 일본학자 야쓰이 세이이츠가 쌍릉을 조사할 당시 발굴한 치아 4점과 목관조각, 토기류 등을 99년 만에 수장고에서 꺼내 분석해보니 무덤 석실에서 나온 송곳니, 어금니가 20~40살 성인 여성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관심을 모았다. 같이 출토된 적갈색 연질토기 1점도 7세기초 신라토기와 비슷한 색깔·모양이어서 백제권의 회색빛 토기류들과는 크게 달랐다. 목관 속 주검의 나무베개 일부로 추정해온 목재 2조각은 적외선 촬영 결과 표면에 먹으로 그려진 넝쿨무늬가 발견됐는데, 2009년 익산 미륵사터석탑에서 나온 보물인 7세기초의 사리 보관용 금동제사리외호 무늬와 크게 닮았다. 게다가 함께 나온 위금(가로씨줄에 색을 입혀 짠 비단) 직물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급직물로 판명됐다. 출토된 유물들이 7세기 초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쌍릉의 주인은 7세기 중엽 세상을 뜬 무왕이 아니라 신라 등 외지에서 온 여인이며, 사후 고급 부장품들과 함께 묻혔다는 추론까지 제기할 수 있게 됐다. 무왕이 서동요를 퍼뜨려 결혼하게 됐다는 연인 선화공주의 실체 논란에 새 변수가 출현한 셈이다.

1917년 발굴당시 전북 익산 석왕동 쌍릉의 대왕릉 무덤 안을 찍은 유리원판 사진. 삭아서 흐트러진 백제시대의 관 조각들이 보인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야쓰이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야쓰이 비망록과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 기록들을 참고하면, 쌍릉 조사는 1917년 12월초 야쓰이를 중심으로 오바 쓰네키치, 오가와 게이키치 등이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는 1917년 삼한과 가야, 백제 유적의 조사에 집중하게 되는데, 쌍릉 발굴은 이 조사의 일부였다. 마한 무덤으로 알려진 쌍릉을 굴착해 역사적 흔적을 찾고, 위만에 쫓겨 마한으로 도피했다고 사서에 기술된 고조선 준왕의 흔적도 찾아보겠다는 게 야쓰이의 내심이었다. 고분 상부에 수직 갱을 뚫는 도굴식 작업으로 들어간 무덤 안은 대부분 도굴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보이는 화강암제 석실 얼개가 드러났고, 청동관못이 박힌 관뚜껑과 금속제 관 장식물(금구) 등이 나타났다. 71년 무령왕릉에서 왕과 왕비의 목관이 확인되기 전까지 유일하게 온전한 꼴을 갖춘 백제 목관이 이때 등장했다. 야쓰이는 이듬해 나온 조사보고와 복명서에서 쌍릉을 17년 조사에서 풍납리토성, 능산리 고분 등과 더불어 주목되는 유적 가운데 하나로 기술했다.

“쌍릉의 대묘, 소묘 모두…그 형식, 용재는 백제 능묘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며…분구, 석곽 및 목관 등의 위대함을 생각한다면 백제의 왕릉 또는 그것에 준하는 자의 능묘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현실에 잔존한 목관은…실로 백제 말기의 왕족의 관재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하고 귀중한 유물이다…상세한 내용은 특별보고에 기록할 필요가 있다.”

야쓰이는 특별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뒤 왜의 것으로 단정한 나주 반남고분과 신라고분 조사에만 골몰했다. 쌍릉 조사 문서와 유리건판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만 각각 20여건이 전한다. 쌍릉 유물들은 그 뒤에도 한세기 가까이 수장고에 묻혀있었다. 야쓰이 등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왜 한사군, 신라 유적에 비해 백제에는 열의를 드러내지 않았던 걸까.

일본 학자들은 애초 백제유적에서 조선, 일본이 한뿌리였다는 ‘내선일체’를 실증하려 했다. 세키노와 야쓰이 조사단은 1911~12년 서울 송파지역(당시는 경기도 광주군)의 석촌동고분을 처음 조사했다. 15년엔 도쿄제국대학의 구로이타 가쓰미가 세키노 조사단과 합류해 부여 능산리 일대에서 5~6기의 고분을 발굴조사해 중국 남조와 백제, 일본 아스카문화의 연관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대왕릉 석곽 안에서 출토된 나무베개 조각을 적외선 촬영한 사진. 두갈래로 이어지는 당초무늬가 보인다. 미륵사터 서탑에서 나온 금동제사리병(외호) 표면에 새긴 무늬와 비슷해 연관성이 주목된다.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그러나 백제 유적은 대박을 노리던 일본학자들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금관 등의 화려한 금속유물이 쏟아져 나온 낙랑, 신라 유적과 달리 부장품을 적게 묻는 관행이 백제후기 유적으로 갈수록 도드라졌고, 도굴, 훼손도 격심해 유물양이 한참 떨어졌다. 야쓰이 등이 집요하게 찾았던 임나일본부 실증유물들이 별로 없다는 점도 작용해 갈수록 백제권 조사는 시들해졌다. 일본 학계의 이런 백제 홀대는 20~30년대 부여 능산리와 공주 송산리 고분 조사를 도굴범 의혹을 받았던 현지 연구자 가루베 지온에게 사실상 떠넘기면서 더욱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학계의 무관심은 해방 뒤에도 지속돼 71년 무령왕릉 발굴에도 불구하고 90년대까지 백제 고고학은 침체를 면치 못했다. 발굴 100주년을 앞두고 뒤늦게 재조명된 쌍릉 유물들은 그래서 상징성이 크다. 식민사학자들의 외면 속에 사장될 뻔했던 처지에서 겨우 빛을 본 셈이기 때문이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야쓰이 비망록이란? 정인성 교수가 지난해 일본에서 입수한 야쓰이의 조선 고적 조사 관련 문서 1만여점의 컬렉션. 1909년 첫 고적 조사 당시 답사일지와 촬영 목록, 각종 메모와 경비 영수증까지 포함돼 일제강점 초기 고적 조사의 세부를 살필 수 있는 일급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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