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그후..마을 사람들 상처는 더 깊어졌다

조성완 기자 2014. 9. 11. 09: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주 = 데일리안 조성완 기자]

◇ 2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결사반대'라고 씌여진 노란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가운데 깃발 너머로 제주해군기지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 2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중덕해안가에서 해군기지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 문정현 신부가 2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해군기자 공사장 정문 앞에서 강정마을의 평화와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촉구하는 미사를 마친 뒤 시민사회단체들의 '강정 댄스'를 바라보고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 2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해군기자 공사장 정문 앞에서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과 수녀들이 강정마을의 평화와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촉구하는 미사를 드리고 있는 가운데 공사 차량의 진출입이 방해되자 경찰들이 신부들의 자리를 옮겨 공사 차량의 운행이 되도록 막고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 2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의 한 사거리에서 제주해군기지 건설의 찬성입장인 나들가게와 반대입장인 코사마트가 보이고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깊어진 갈등의 골이 쉽게 풀리지 않아. 어떻게 억하심정이 하루아침에 풀릴 수 있겠어. 쉽지 않아. 쉽지 않아."

강풍이 불고 간간이 싸라기 같은 비가 쏟아지는 4일. 제주 강정마을에서 만난 50대 후반의 김모 씨는 손에 든 목장갑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한숨과 같이 던진 한마디에는 씁쓸함과 함께 회복되기 힘든 갈등의 골에 대한 안타까움이 젖어 나왔다.

강정마을은 참여정부 시절이었던 지난 2007년 김태환 제주특별도자치도지사가 도민 여론조사를 근거로 제주해군기지 최우선 대상지로 선정, 발표한 이후 현재까지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

주민들은 찬성과 반대로 나눠져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일삼았다. 사거리를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상점은 각각 찬반으로 나뉘어 마찰을 빚었다. 주민들도 자신의 의견과 같은 상점만 이용했다. 심지어 찬반으로 나뉜 한 형제는 부모님 제사도 같이 지내지 않을 정도였다.

지난 2011년 외지인이 본격적으로 강정마을 갈등에 뛰어들면서 마을 전체는 갈등과 불신의 벽에 갇혔다. 수적인 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찬성쪽 주민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못한 채 숨을 죽여야 했고, 반대쪽 주민들은 외지인들의 지원 속에 강도 높은 반대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2012년 총선과 대선이 끝난 이후 강정마을을 향하던 야당 정치인들은 발길을 끊었다. 시민 운동가들도 해군기지가 대중의 관심사에서 멀어지자 하나둘씩 강정마을을 떠났다. 그렇게 남겨진 강정마을은 갈등의 잔재를 끌어안은 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떠난 외지인들이 남긴 것은 주민갈등 뿐 "깊어진 갈등 회복이 쉽지 않다"

2년여만에 다시 찾은 강정마을. 과거 외지인들이 주축이 된 시위가 빈번했던 강정교 앞 해군기지 건설 현장 출입구는 이제는 용도가 다한 듯 높은 펜스로 굳게 막혀 있었다. 남은 것은 당시의 치열했던 시위현장을 보여주는 나무로 만든 피켓과 찢어진 채 흩날리는 현수막뿐이었다. 그마저도 비바람으로 인해 곳곳이 헤지거나 페인트가 지워진 상태였다.

여전히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사제들과 일부 주민들이 새롭게 마련된 건설현장 출입구 앞에서 '종교행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참여도는 눈에 띄게 저조했다. 해군기지 앞 도로는 관광객들의 자동차와 덤프트럭 등의 차량 이동을 제외하면 주민들의 이동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해군기지 앞에서 만난 경찰 관계자는 "이제는 해군측과 반대측의 충돌도 거의 없다. 요즘에는 외지 사람들도 거의 다 빠져나갔고,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참여를 하지 않는다"며 "여기 보이는 사제단이 매일 미사를 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반대측 사람들이 해군기지로 헤엄쳐 가기 위해 모였던 강정항도 마찬가지였다. 바다 위에 떠있던 해경 경비정도, 방파제에 모여있던 시민운동가들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다. 그저 몇몇 관광객들이 낚시를 즐기며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이처럼 겉으로는 평화로워진 강정마을이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직까지 갈등의 골은 남아있었다. 서로 쉬쉬하며 애써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기자와 만나서도 자신의 이름은 물론 성(姓)을 알려주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했다.

강정항 입구에서 만난 50대의 한 남성은 검게 그을린 얼굴에 미소를 띠며 "지금은 아주 평화롭다. 예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좋아진 것이다"라면서도 "그래도 아직까지 뭔가 거북스러운 면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마을회관 근처에서 만난 60대 초반의 남성은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며 "깊어진 갈등이 쉽게 회복되지는 않고 있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내가 "그런 말을 왜 하느냐"고 불평하자 이 남성은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분위기는 그렇다"며 입을 닫았다.

편의점 앞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는 "이제는 외지 사람들이 나가서 좀 조용해졌지만 아직까지 주민들 사이에서는 골이 깊다"면서 "찬반으로 나눠졌던 형제지간에 아직까지 제사도 같이 안 지내는 데가 있다. 쉽지 않다. 어쩌겠는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름때 낀 손으로 담배를 피던 김모 씨는 "주민들끼리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은 곳도 많다. 억하심정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풀리겠는가"라며 짙은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과거 주민 갈등의 가장 상징적인 존재였던 곳은 사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점 A와 B였다. A는 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했고, B는 반대했다. 외지에서 들어온 시민운동가들은 찬성 입장인 A는 전혀 이용을 하지 않았다. 반면 B는 반대측 인사들로 항상 손님이 북적였다.

A의 주인은 이날 기자와 만나 "외부단체의 주장이 다 거짓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반대측 주민도 이제 (외부단체 주장을) 믿지 않는다"며 "강정마을은 이번까지 포함하면 세 번의 갈등을 겪었다. 해군기지가 완성될 때쯤에는 다 해소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에는 군복을 입고 지나가는 군인들만 봐도 욕을 하고 했는데, 이제는 그런 모습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반면 B의 주인은 "세월호 사건도 있고, 여기는 특별한 게 없으니까 시민운동가들은 많이 빠져나간 상태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찬반으로 나뉜 그대로다"면서 "이건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화해가 힘들다"고 손사래를 쳤다.

갈등 증폭시킨 외지인들에 대한 적개심 "남아있는 외지인도 싹 나가줬으면"

좀처럼 말을 아끼는 강정마을 주민들도 외부에서 들어왔던 시민운동가들에 대해서는 깊은 분노를 드러냈다. 주민간의 문제에 외지인이 끼어들면서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다는 것이었다.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은 지난 2006년부터 화순을 시작으로 위미리 해군기지까지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2011년 6월초에는 111개 시민단체가 '제주해군기지 건설 백지화를 위한 전국대책회의'를 결정하고 강정마을에 상주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현재는 대부분의 시민운동가들이 빠져나갔지만 여전히 일부분이 남아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천주교 사제단을 포함해 10여명 남짓한 이들은 매일 오전 11시 건설현장 출입구 앞에서 미사를 연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신부들은 출입구 앞에 놓은 플라스틱 의자 위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앉아만 있다. 입구가 막혀 빠져나가지 못한 건설차량도 그저 기다릴 뿐이다.

일정 수량 이상의 차량들이 채워지면 경찰이 "여러분은 지금 공무집행방해를 하고 있으니 속히 이동해주십시오"라고 안내방송을 한다. 두 차례의 방송이 진행되면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이 나와 의자채로 신부를 들어 차량 운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이동시킨다.

모든 차량의 통행이 완료되면 신부들은 다시 의자를 들고 출입구 앞으로 원위치를 한다. 잠시 뒤에 또다시 경찰의 안내방송 후 신부들은 의자채로 이동된다. 이런 일이 미사가 진행되는 1시간가량 계속 반복된다. 한켠에는 '지금 미사 중입니다. 종교 행사를 방해하지 마십시오'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놓여 있다.

경찰 관계자는 "매일 오전 11시에 여기에서 미사를 한다. 이제는 별다른 충돌도 없다. 그저 매일매일 반복될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날은 건설현장의 한 인부가 길을 막아선 신부들에게 항의를 하면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3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이 남성은 차에서 내린 뒤 한 신부의 곁으로 다가가 "신부님, 내가 엊그저께 집에 가려고 비행기표를 사놨는데 이게 뭔 일이에요. 내가 지금 집에도 못가고 있잖아요. 늦었다고요"라고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신부가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이 남성은 "신부님,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이건 지금 말이 안되잖아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경찰은 다시 두차례의 방송이라는 절차를 거친 뒤에 신부들을 의자채로 이동시켰다.

이들 외부 시민운동가들에 대해 주민들은 거친 반응을 보였다.

마을 입구에서 백발의 노모를 모시고 가던 중 기자와 만난 60대 중반의 한 남성은 "요즘 우리는 평화롭다. 저 외지인들만 싹 다 나가주면 더 평화롭겠다. 아주 저사람들 때문에 미치겠다"고 거칠게 쏟아부었다.

공원 근처에서 만난 한 50대 초반의 여성은 "예전에는 새벽마다 사이렌을 울리고 해서 정말 힘들었다"면서 "이제는 외지 사람들이 많이 나가서 조용해졌다. 외지 사람들이 나가니까 우리는 아주 좋다"고 털어놨다.

강모 씨는 "외지인들이 원래 마을회관에 머물렀는데 그 사람들 다 철수하라고 했다. 그나마 삼거리에 머물고 있는데 거기도 조만간 철수해야 될 것"이라며 "이제 그만 모두 강정마을에서 떠나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Copyrights ⓒ (주)데일리안,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