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담화의 소름 돋는 한 문장

하지율 2015. 8. 1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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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일본 총리의 '진심'이 위험한 까닭

[오마이뉴스 하지율 기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2013년에 '731'이 새겨진 전투기에 탑승하며 사진을 찍어 큰 논란이 된 바 있다. '731'은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마루타 생체실험을 벌인 일제 관동군 산하 731 세균전 부대의 상징이다. '공부의 신' 강성태는 이를 두고, "독일 총리가 나치 친위대 유니폼을 입은 것"과 같다며 "총리라는 자가 731의 의미를 몰랐다면 바보를 넘어 무뇌"고 "알고도 이 짓을 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닌 악마"라고 평하기도 했다.
ⓒ 산케이신문
1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전후 70년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과거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리의 아들이나 손자,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도 사죄의 숙명을 안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윤리적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관련기사:'일본' 빠진 사죄와 반성... 아베 '꼼수 담화').

또한 그가 예상을 깨고 '침략', '식민지배', '사죄' 등의 핵심 단어를 조합한 담화를 내놓았지만, 구체적으로 일본이 어떤 사죄와 그에 응당한 행동을 표현했는지 명시하지 않았다. 또한 사죄의 표현과 행동을 "하겠다"가 아닌, "해왔다"는 식의 과거형 진술로 일관해 외교적으로 상당히 '교묘한' 담화가 됐다. 우선 아베 담화의 핵심문장 여섯가지를 뽑아 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 분석해보았다.

[1]"일본은 지난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해 그동안 반복적으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나타내왔다." ☞ 어떤 식으로 사죄를 표현했다는 것인지 구체적 내용이 없으며, 이 문장은 과거형일 뿐 현재 사죄하겠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2]"전후 70년을 맞아 전쟁으로 쓰러진 모든 사람들의 영혼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이고 일본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 ☞ "전쟁으로 쓰러진 모든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일본 전범들까지 몽땅 포함하는 전칭 진술이다. 구체적 식민지배 피해 국가와 피해자들을 특칭하고 있지 않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강제 합사해놓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던 아베 총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3]"일본이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실과 고통을 안겨줬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 단순히 가슴이 아프다는 내용일 뿐 사죄에 대한 명시적 표현이 아니다. 단순 동정으로 비칠 수도 있다.

[4]"일본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행동으로 옮겼다." ☞ 역시 일방적 주장일 뿐 구체적 논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피해국가와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에 대한 반박도 가능할 수 있다.

[5]"인도네시아, 필리핀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아시아 이웃인 한국, 중국, 대만 등의 국민들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마음으로 새겼으며 이는 역대 내각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 ☞ 특칭 진술이긴 하지만 정확히 사죄를 언급하고 있진 않으며, 어떤 식으로 마음에 새겼다는 것인지 구체적 내용이 없다.

[6]"사변, 침략, 전쟁, 어떤 무력의 위협과 행사도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두 번 다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식민 지배로부터 영원히 결별하고 모든 민족의 자결 권리가 존중받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 '일본'이라는 책임소재를 명시하지 않은 공허한 문장이다.

아베의 진심, 이 문장에 있다

"이제 일본도 전후 태어난 세대가 전체 인구의 8할을 넘고 있다. 과거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리의 아들이나 손자,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도 사죄의 숙명을 안겨주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 제시한 문장들을 다 차치해두더라도 이 문장 만큼은 놓치지 않길 권한다. 다른 문장들과 달리 주어(일본), 논거(전후세대가 8할), 주장(사죄의무 없음)을 다 갖추면서 아베의 진심이 가장 구체적이고 명확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문장 뒤에 "그러나 우리 일본인은 세대를 넘어, 과거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와 "겸허한 마음으로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미래 세대에 넘겨줘야 할 책임이 있다"라는 문장이 덧붙었음을 밝힌다. 그렇지만 이 역시 사죄와는 무관하다.

결국 핵심은 전후세대는 사죄 의무가 없다는 주장이다. 신화통신, AP통신, 로이터 통신 등 외신들 역시 일제히 여기에 주목하면서 그 중요성을 부각하고 있다. 외신들이 이 주장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말들이 꾸준히 있어왔기 때문이다.

가령 존 하워드 전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는 원주민들에 대한 공식 사죄를 거부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현 세대가 앞선 세대의 행위를 공식 사죄하고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미국의 흑인 노예제 배상을 둘러싼 미국 내 논쟁에서도, 헨리 하워드 전 공화당 의원은 "나는 한 번도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다. 나는 한 번도 누구를 억압한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앞선 세대가 한 일을 내가 보상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전후세대는 책임없다? 문제는 이렇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표지 사진.
ⓒ PenguinBooksLtd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빚을 졌다면" 그것은 합의의 문제, 즉 "자신의 선택이나 약속이나 동의의 결과"라고 밖에 생각을 못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주의적 자유'를 신념으로 삼기 때문에, "집단적 책임 의식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조상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라고 한다면, 왜 자신들의 자유를 침해하느냐고 도리어 성을 내기 일쑤다. 샌델 교수는 이런 식의 자유에 대한 인식의 뿌리를 근대 서양철학에서 대두된, '독립적 자아' 개념에서 찾는다.

이런 개념을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를 마치 원자 쪼개듯, 최소단위인 '개인'들로 나누고 개인들 사이의 관계가 합의를 잘 유지시키고 그 합의에 대한 책임이나 지도록 놔두면, 알아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샌델 교수는 이런 식의 자아 개념은 허구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아무 내용이나 맥락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고, 사람들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면서 '누구누구의 아들', '누구누구의 친구', '누구누구의 손자' 하는 식으로 관계로 이름지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나'가 존재할 수 있는 건, '나'와 구별 되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립적 자아란 건 픽션으로만 존재하며, 우리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공유하는 어떤 이야기에 포함된 사람들이다. 샌델 교수는 이런 자아를 "서사적 자아"라고 설명하면서, 여기서부터 현실적인 자유와 도덕적 의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므로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왜곡)하려는 시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샌델 교수는 사람이 지켜야할 윤리적 의무를 '자연적 의무', '자발적 의무', '연대 의무' 세 가지로 나눈다.

'자연적 의무'는 합의가 필요치 않는 의무로, 인간으로서 마땅히 서로 존중해야할 보편적 인권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 의무'는 합의를 통해 생긴 특수한 의무들, 즉 계약같은 것들이다. 샌델 교수가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까지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로, 특수하면서도 합의와 무관한 '연대 의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연대 의무는 연좌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아시아인들은 일본의 '전후'세대가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게끔 하지도 않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강제 징집하지도 않았으며, 난징 대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 쯤은 너무나도 잘 안다.

"무릎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
ⓒ germanyinfo
그런데 독일의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1970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가서 무릎 꿇고 유대인 학살과 전쟁책임에 대해 사죄했을 때, 온 유럽이 독일에 박수를 쳤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나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한 나라의 총리로서 사죄를 했을 때, 세계언론들이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칭찬한 이유는 그가 독일을 대표해 과거의 잘못된 '서사'를 더 이상 이어가지 않고 새로운 '서사'를 쓰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 전후세대의 구체적인 '누구누구'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교묘히 뒤틀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과거의 서사를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일본'의 사과를 요구할 뿐이며, 일본이 새로운 '서사'를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의무를 다하라고 요구할 뿐이다.

그러나 서양 근대 문물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오히려 더 심한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로 치달았던 일본은 여전히 깨끗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일본이 자초한 일이다. '전후세대'를 운운하며 시간을 끌고 역사의식을 희석해 나갈 수는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일본이 일으켰던 임진왜란에 대해서 사과하라고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일은 '서사'로서 역사 속에서 기록될 것이며, 일본과 일본인이 꾸준히 보여온 행위들은 국제적 신뢰를 꾸준히 떨어뜨릴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왜곡된 자아와 자유 개념은 여전히 과거 망령의 싹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철학자 박치우도 일찍이 비슷한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다(관련기사:'누구를' 위한 자유민주주의인가).

우리도 일본과 하루 빨리 친하게 지내고 싶으며, 일본인들 중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잘 안다. 단지 아베 총리가 다음 해에는 좀더 발전된 담화문을 들고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한국 정부 역시 과거 월남전 문제에서 베트남에 사과할 부분은 하루빨리 사과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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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샌델과 공화주의 공공철학>(맹주만 / 철학탐구 제34집 /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 2013)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 김영사 / 2010 /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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