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경호 가다 몰사 당한 53명 "발설마라" 극비 붙여진 끔찍한 진실

2007. 3. 1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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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무려 53명의 군인들이 전원 몰살한 이 사고는 이미 역사속에 묻혀졌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유족은 대부분 고인이 됐거나 연로하지만, 여전히 25년 전 사고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부터 취재해 온, 일명 '봉황새 작전'으로 불리는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처리 과정 등을 모두 4차례로 걸쳐 보도한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장윤선·김도균 기자]

▲ 1982년 2월 5일 특전사 대원 등 53명을 태운 C123기가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 바위에 머리를 박고 추락했다. 사진은 25년만에 다시 가본 사고현장이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이재수씨. 지난 1일 <오마이뉴스>와 함께 사고현장을 찾아나선 그는 25년 전 사고기의 잔해가 1분도 채 안 돼 땅속에서 나오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그만 파요. 이제 와서 뼛조각이 나온들 뭘 어쩌겠어요. 유족 두 번 죽이는 꼴 아니에요?"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재수(57)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감았다. 지난 1일 한라산 해발 1100m고지에서 류머티스관절염도 잊은 채 정신없이 25년 전 비행기 잔해와 유골을 찾던 그녀가 철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섞어 토해낸 말이다. 잊고 싶은 맘 반, 찾고 싶은 맘 반인 듯 싶었다.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고, 재수씨는 눈 안 가득 눈물을 머금고 먼 하늘과 맞닿은 제주바다를 응시했다. 반평생 가슴 속 응어리가 돼버린 한을 바닷물에 씻어내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날아든 한 마리의 까마귀가 적송 가지에 앉아 까악까악 울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누이에게 이 준위가 인사하는 듯 말이다.

이재훈 준위는 특전사령부 707대대 소속으로 82년 2월 5일 오후 1시 30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출발한 공군 수송기 C123기에 탑승했다. 제주 연두순시와 제주국제공항 준공식에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특전대원들을 미리 태워 출발시킨 항공기였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제주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한라산 중턱 개미등 계곡에 머리를 박고 추락했다. 이 사고로 53명의 군인(특전대원 47명, 공군 6명)들이 전원 사망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전쟁을 제외하고 평시 작전 중 군인들이 한꺼번에 몰살한 이 사건은 매우 큰 사건이었음에도 '단신' 거리로 취급됐다. 유족들은 지금도 이 사건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은 이 사건을 '제주 봉황새작전'으로 기억하고 있다.

"저것 봐요, 저것 봐. 이런 게 다 예사로 안 보인다니까."

재수씨가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분홍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밑에 흙이 껴 시커멓게 될 정도로 땅을 팠다. 판초우의, 랜딩기어 일부 조각, 안전벨트, 알루미늄 기체, 쇠사슬, 탄피, 천 조각…. 재수씨가 땅 밖으로 끌어올린 것은 25년 전 사고로 불에 탄 C123기 잔해들이었다.

한 뼘 길이의 나무막대기로 5㎝ 정도 팠을까, 흙에 섞여 부식된 사고기의 고철 덩어리를 찾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종이뭉치가 딱딱하게 굳은 것 같은 회백색의 항공기 잔해들은 마치 줄기에 달린 고구마가 무더기로 땅 속에서 끌려나오듯 그렇게 우르르 몰려 나왔다.

재수씨는 "개미등 계곡 사고현장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유골도 나올 것"이라며 "군 당국이 당시 사고를 얼마나 허술하게 수습했는지 아느냐"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 줌 재로 변한 남동생 죽음의 진실을 이제는 밝히고 싶다는 재수씨는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사고기가 머리를 박은 커다란 바위에 세워진 원점비. 재수씨는 원점비 앞에 종이컵을 놓고 소주를 콸콸콸 쏟아붓고, 평소 남동생이 사랑하던 담배를 스무 개비 올려 일일이 불을 붙였다. 담뱃불이 긴 꼬리표를 달고 하늘로 연기를 피워올리는 동안 재수씨는 낮은 톤의 목소리로 25년 전 사고현장 속으로 기자들을 안내했다.

▲ 제주 한라산 관음사 입구 등산로 4.1km에 위치한 원점비. 이 원점비에서 사고현장까지는 조릿대를 헤치고 약 150m 더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양송남 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은 82년 2월 6일 군 수색대와 함께 사고현장을 수색했다. 양씨는 "당시 사고현장에서 갈기갈기 찢어지고 불에 탄 시신들을 목격했다"고 술회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1] 양송남씨 "갈기갈기 찢어진 시신,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말라더라"

82년 2월 2일부터 제주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당시 신문들은 모두 "제주에 북서풍 바람이 불고 가끔 흐리고 한때 눈이나 비가 내리겠다"는 기상예보를 연달아 보도했다. 지난달 28일 제주 한라산 영실매표소에서 만난 양송남(57·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씨도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참 많이 왔습니다. 날씨도 많이 흐렸고. 한라산엔 1m 높이의 눈이 쌓일 정도로 눈이 계속 왔어요. 사고 전날(4일) 밤 12시경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다음날(5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진들이 한라산 등반을 해야 하는데 안내자가 필요하니 좀 협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날도 이렇게 궂은데 무슨 한라산 등반인가 생각했지만 당시 청와대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어요. 힘이 셌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도저히 등산할 기상이 아니었어요."

양씨는 솔직히 불만이었다. 전문산악인이 아니면 등반하기 어려운 날씨에 권력을 내세워 등산로를 안내하라는 것은 '명령'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날씨 좋을 때 오시라고 권유할 형편도 못 됐다.

당시 등산로에는 입구에만 20㎝ 이상의 눈이 쌓일 정도로 상당한 눈이 내렸다. 일반인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당시에는 변변한 등산화도 든든한 오리털점퍼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안개가 짙게 깔리고 시야거리가 50m도 안 될 정도로 시계가 무척 안 좋아도, 등반은 해야 할 처지였다.

"6일 새벽 3시경 집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어요. 다짜고짜 용담1동 동사무소 앞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어디에 간다는 말도 없이 무조건 경찰트럭에 타라고 해서 탔죠. 차에 타보니 동료 2명이 동행했어요. 모두 4·3제주항쟁을 겪은 탓에 아무도 말하지 않고 20~30분 정도 달렸는데, 도착한 곳은 아라초등학교였습니다. 군인들이 교실에 커다란 군 작전지도를 걸어놓고 한라산 전체를 구역별로 나눠놓고 누가 어느 길로 갈지 정했습니다."

"흰 눈 위에 조각난 주검들이"

양송남씨는 50여명의 특전사 대원들과 함께 본부 수색대 안내를 맡았다. 나머지 두 명은 어리목 길과 성판악 코스를 안내했다. 하늘에서는 계속 공군 비행기가 웽웽 거렸고, 바다에는 해군 함정이 왔다 갔다 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몰려왔다.

"도대체 왜 별안간 군인들이 한라산에 떼를 지어 올라가야하는지 몰랐어요. 그냥 안내하라니까 안내했지, 군인들에게 감히 뭘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민간인은 나 포함 우리 직원 2명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군인이었으니까요. 그날도 날씨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책임 인솔자는 최락도 소령, 그 사람이었어요."

관음사 입구를 출발해 산천단 검문소로 향했다. 도로는 빙판이었고 군인들이 탄 버스가 도랑에 빠졌다. 버스를 빼내지 못해 그 때부터 무조건 걷기 시작했다. 그 길에 공주사대 산악훈련팀을 만났는데 최 소령이 "어제 오후 3시경 산속에서 굉음을 듣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양씨는 그때서야 '사고로구나' 직감했다.

새벽 4시부터 걷기 시작해 낮 12시가 돼서야 탐라계곡 흙붉은오름 중간지대에 도착했다. 해발 1200m 고지였다. 점심식사로는 군인들이 짊어지고 올라온 쌀을 항고(코펠)에 넣고 눈을 퍼담아 지은 밥이 준비됐다.

그러던 오후 1시경 최 소령에게 무전이 왔다. 사고가 난 기체를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양씨와 최 소령, 군인들은 서둘러 방향을 돌려 오후 5시가 돼서야 개미등 계곡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울창한 숲의 나무들을 싹둑 잘랐더군요. 등산로에서 100m 정도 걸어들어가면 움푹 패인 골짜기가 나오는데, 거기 암반을 들이받은 사고현장은 무척 참혹했습니다. 시신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죠. 최 소령이 군인들을 집합시켜놓고 업무를 나눴습니다. 시신 수습팀, 폭발물 꺼내는 팀 등으로 나눠 일에 착수하라고 했는데 군인들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머뭇머뭇 주저하니까 다시 재집합시키고 호통을 쳤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고 기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주변에는 항공기 안에 실었던 물건과 조각난 사체들이 흰 눈 위에 널려 있었다.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검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그 때 최 소령이 양씨에게 다가왔다.

"민간인으로서는 처음 목격한 것이니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지금 이날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쉬쉬하면서 살아왔지요."

양씨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사고에 대해 떳떳하게 털어놓는다면서 말을 보탤 것도 없고 덜 것도 없이 당시 겪고 본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 82년 2월 5일 C123기 사고 뒤 특전사에서 세운 충혼비.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충혼비 앞에서 마주친 새색시와 타올세트

산에서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뒤 내려와 밤 9시 저녁뉴스를 보는데, TV엔 아주 짤막한 자막으로 '공군기 추락사고'라고만 언급돼 있어 의아했다. 정확한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일체 보도가 없었다. 다만, '작전 중 순직'이라는 짧은 멘트만 있었다고 기억했다. 양씨는 사고현장의 심각성에 비해 보도는 터무니없이 약소했다고 지적했다.

"그 당시 최 소령 얘기로는 특전사 군인 1명당 1억원 이상 돈이 들어갈 정도로 훈련이 잘 된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태평양 한 가운데 떨어뜨려놔도 살아나올 사람들이라고 말이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무참하게 사고를 당한 것은 당시 엄청난 눈보라에 안개가 잔뜩 끼는 등 기상이 안 좋은데 무리하게 비행기를 띄워 그런 게 아닌가 추측을 해봅니다. 시계가 안 좋으니까 조종사가 한라산을 공항으로 착각한 것 아닌가 이거죠."

양송남씨는 25년 전 '봉황새작전'으로 희생된 특전대원들을 생각하면서 가끔 충혼비를 찾는다.

재작년(2005년)에는 충혼비 앞에서 한 신혼부부와 마주쳤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새색시는 이 비행기 사고의 내력을 알아보고 싶다며 양씨에게 다가왔었다. 알고보니 이 C123기에 탑승했던 한 특전대원의 딸이다. 생후 6개월에 아버지를 잃은 딸은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이 많았던 게다. 양씨는 군 당국이 그를 위해서도 정확한 사고원인을 말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양씨는 25년 전 본부 수색대원을 이끌고 눈 덮힌 한라산 사고현장을 수색해준 대가로 고맙다는 소리 한 마디 듣지 못했다. 83년, 3장짜리 타올세트를 받은 게 끝이었다.

"박희도 특전사령관 명의로 수건 3장이 배달됐어요. 82년 2월 눈범벅이 된 한라산을 옆집 드나들듯 돌아다닌 저와 제 동료들이 함께 한장씩 나눠썼습니다. 그 뒤로 일체의 연락도 없었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 서재철 전 <제주신문> 기자는 82년 2월 7일 새벽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올라가 개미등 사고현장을 촬영했지만 당시 보도통제때문에 단 한 컷도 지면에 쓰지 못했다. 서 전 기자는 "89년엔가 민주화 바람이 분 뒤에야 이 사진을 지면에 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2] 서재철 <제주신문> 기자 "취재했지만 보도는 못 했던 그 사건"

2월 5일 제주 날씨는 매우 음산했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서재철 당시 <제주신문> 사진기자는 편집국을 요란하게 울리는 텔레타이프 소리에 맞춰 긴급 타전된 세 줄짜리 뉴스를 봤다. '공군 비행기 제주 훈련 중 추락-추자도 인근'. 1보가 떴다. 2보엔 '제주해역'으로 바뀌었다. 9시 저녁뉴스가 흘러나오는 TV 브라운관에도 마찬가지로 짧게 언급됐다.

지난달 28일 제주문예회관 휴게실에서 만난 서 전 기자는 82년 신군부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언론은 입이 있으되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술회했다.

서 전 기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제주 연두순시와 제주공항 준공식 행사의 근접취재권이 나와 아침부터 공항에서 대통령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미리 참석한 몇몇 장관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한라산을 수색했는데 아직도 못 찾았대?" "그래요."

전날 댕댕댕 편집국을 요란하게 울리던 텔레타이프 소리와 장관들의 말이 오버랩 됐다. '한라산이구나' 연두순시 등 '대통령 취재'를 마감한 서 전 기자는 6일 오후 회사에 들어가 보고했다.

"우리 고장에 이렇게 큰 사건이 발생했는데 안 갈 수 있나, 가야한다고 그랬죠. 회사에서는 모두 위험하다고 했어요. 당시엔 정말 그랬죠. 6일 해질녘 한라산 관음사 코스에서 양송남씨를 만났어요. 사고지점이 개미등 계곡이라는 것만 알려주고 조심하라고 했어요. 군인이 사방에 깔려있는 상황에서는 취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서 일단 철수하고, 인적이 뜸한 새벽에 올라가서 다시 촬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서 전 기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사고소식을 접하고 취재를 온 <경향신문> 기자들과 함께 7일 새벽 빙판길을 달음박질로 뛰어 올라갔다. 아라초등학교에 본부를 차린 수색대는 벌써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아수라장이었어요. 한쪽에 사체와 불발된 포탄들을 늘어놓은 걸 봤습니다. 시신이 어떤지 확인할 새도 없이 후닥닥 찍고 빨리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혹시라도 군인들과 마주칠까 두려웠죠. 등산객으로 가장해 사진 찍고 내려오는데 사고수습에 동원된 도청 공무원이 계속 '서 기자님, 이거 보도 못하는 줄 알죠? 보도하시며 안 됩니다' 그러는 거예요. 못들은 척 했지만 굉장히 거슬리는 소리였습니다."

서 전 기자는 흑백필름으로 총 6롤을 촬영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사진을 찍었지만 당시 그는 단 한 장의 사진도 지면에 쓸 수 없었다.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회사에 들어가 촬영한 내용을 보고하니 필름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뭔가 낌새가 이상해 5롤은 회사에 제출하고 1롤만 따로 갖고 있었죠. 나중에 어떻게 될 줄 모르니까요. 제가 제출한 필름 5롤은 몽땅 특전사에 넘겨졌더군요. 그 땐 뭐 다 그랬죠."

서 전 기자가 촬영한 당시 사고현장 사진은 민주화운동 바람이 분 뒤에나 쓸 수 있었다. <경향신문> 기자들도 이 사건에 대한 보도는 일체 하지 못했다. 서 전 기자는 전두환 정권 당시 보도통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모를 것이라며 입을 뗐다.

"82년 당시 군 관련 보도내용은 쓰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절대로 쓸 수 없었어요. 요즘 기자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그렇게 엄혹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89년인가 이 사건을 첫 보도하면서 '몇년만에 햇볕 본 사고현장' 이런 식으로 보도했던 것 같아요."

서 전 기자가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었다.

▲ 이재수씨가 원점비 부근에서 발견한 숟가락과 유품으로 보이는 시계줄 일부.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3] 마대자루에 담긴 시신을 보았다는 증언

82년 2월 7일 강석모(가명) 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관음사 매표소 근무를 서기 위해 출근했다. 평소와 다른 것은 군인들이 관음사 매표소 주변을 철통같이 둘러싸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던 것.

지난 1일 한라산 관음사 매표소에서 만난 강씨는 당시 일반인들은 이 사건의 현장에 가까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세히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먼 발치에서 시신더미가 마대자루에 실려 내려오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군인 2~3명당 한 자루씩 뭔가가 담긴 마대자루를 운반했어요. 뭐냐고 물었더니 '극비'라고 하면서 5일 날 사고 난 비행기에 탔던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래도 사람을 어떻게 마대자루에 담나, 아무리 군인이라지만 너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광목이나 붕대로 시신을 감쌀만한 여유나 상황이 안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강씨는 7일 하루 동안 군인들이 마대자루에 담긴 시신을 리어카로 운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2~3명의 군인들이 마대자루의 네 귀퉁이를 붙잡고 내려오는 식이었다. 군인들은 불에 탄 시신이 끔찍한 형상이라고 귀띔해줬지만 그는 그 말을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군인들이 며칠간 이 사고를 수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단 하루만에 무려 53명이나 사망한 큰 비행기사고를 후딱 해치우고 자리를 떴다. 7일 이후 강씨는 관음사 매표소 부근에서 군인들을 만나지 못했다.

"감히 사고현장에 가볼 엄두가 안 났죠. 하도 극비, 극비 해서 근처에 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개미등 계곡 인근에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한참 뒤에 우리 직원들끼리 궁금하니까 한번 가보자 해서 가봤는데, 눈이 녹아내리면서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시신토막을 볼 수 있었어요. 개미등 계곡에서 손가락 마디들을 본 기억이 또렷해요. 무척 끔찍했죠."

▲ 이재수씨가 82년 2월 5일 사망한 남동생 고 이재훈 준위를 위해 담배 스무 개비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재수씨와 <오마이뉴스> 취재진이 한라산 개미등 계곡의 한 부분을 파기 시작하자 채 1분도 안돼 사고기의 잔해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4]

머리 뚜껑, 군화 신은 다리... 53인의 유골과 유품들

이재수씨는 스무 개의 담배가 모두 필터 끝까지 다 타들어가자 그제서야 노란 소국 한 다발을 싼 투명 비닐과 리본을 풀었다. 꽃대를 하나씩 풀어 원점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주변에 몰려든 까마귀들을 향해 먹을 것을 휘휘 돌렸다.

▲ 한라산에서 흔하게 마주치던 까마귀. 이재수씨는 한 마리의 까마귀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까마귀 떼는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라산에서 숨진 '검은 베레' 특전대원을 상징하듯 사람들을 따라다닌다며 허망하게 웃었다.

"여기 와 앉으면 금세 까마귀 떼가 몰려와요. 까마귀가 영물이라 음식냄새를 맡고 오는 것이겠지만 유족들은 혹시 저게 내 새끼 아닌가 하죠. 적송에 까마귀 떼가 시커멓게 앉으면 흠칫 놀랄 때가 있어요. 까마귀 떼가 사람 가까이로 저공비행을 하면 정말 무섭거든요."

까마귀 얘기를 하던 재수씨가 다시 고개를 떨구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25년이 지나도록 단 한번도 군 당국으로부터 비행기 사고의 원인에 대해 소상히 듣지 못했다며 가슴을 쳤다. 못난 누이가 좀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답답증은 해갈됐을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전두환정권은 당시 유족들에게 이 비행기 사고의 원인에 대해 성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당시 사고 원인을 추측할 뿐이지 구체적인 사고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게 유족들의 갑갑증이다.

이 사고 이후 100일 위령제를 지낼 때까지도 유족들에게 사고현장을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도 팽배하다. 군인들 몰래 유족끼리 가본 사고현장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100일이 지나도록 군 당국이 제대로 현장수습을 해놓지 않아 처참한 광경을 그대로 목격한 것이다.

재수씨는 "당시 군 당국은 큰 덩어리 위주로만 처리했다"며 "머리카락이 달린 사람의 머리뚜껑, 군화 신은 다리뼈 등의 유골, 수첩이나 시계 같은 유품들 등 여러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82년 근 한 해 동안 개미등 계곡에 비행기가 방치돼 있었어요. 제대로 수습하려고 했다면 헬리콥터를 띄워 바구니를 매달아 온전히 사건처리를 했을 거예요. 군 당국이 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만 했지 정상적으로 처리하지 않았어요. 그저 대충 눈에 띄는 것만 치우고 끝낸 거예요. 전두환정권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전두환 한명을 위해 젊은 군인 53명이 억울하게 죽은 거죠.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장윤선·김도균 기자

덧붙이는 글[발굴탐사] '제주 봉황새작전의 비밀을 찾아서' 기획기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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