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몰이 사회]생각 다른 동료 학생 신상 털어 간첩 신고.. 일상 속 매카시즘 확산

박홍두·김여란·김지원 기자 2013. 9. 12.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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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이고 개혁적이다"라는 이유로,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종북' '친북'으로 몰아세우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단순히 '생각'에 머물지 않고 '신고'라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수준을 넘어 '불법'으로 몰아가는 '매카시즘(정치·사회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려는 태도)'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2013년 한국 사회에서다.

'말'과 '글', '주의·주장'에 대해 족쇄가 채워진다면 수십년간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 얻어낸 사상의 자유는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엄습하고 있다.

▲ 성추행 반대하는 댓글 올린 후 트위터 '투쟁' 단어 문제 삼아'다름'을 '틀림·불법'으로 몰아… 진보·개혁적 주장엔 종북 딱지순수한 학문 연구·강연도 막아… "주변서 신고" 자기 검열까지

■ '진보적 사고'가 '종북·친북'으로

지난 6일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는 저술가 임승수씨(38)는 황당한 일을 당했다. 해당학교의 1학년생이 자신을 국가정보원에 신고한 것이다. 이 학생은 마르크스 경제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임씨의 '자본주의 바로 알기' 과목을 듣고 그의 반자본주의·반미사상을 문제 삼았다.

고려대에서는 학생들이 한 학생의 개인 트위터에 쓴 글을 문제삼아 '종북·빨갱이'로 내몰아 국정원에 신고한 일이 있었다. 박정호씨(25·가명)는 지난 7월 말 고려대 학생 인터넷 게시판 '고파스'의 한 게시글에 댓글을 달았다. 박씨는 최근 잇따랐던 고대 내 성추행 사건들과 관련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는 사회적 원인을 규명하고, 여성 인권을 위해 어떤 조치들이 취해져야 하는지 합의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생들이 반박 댓글을 올렸고, 한 학생은 박씨의 트위터 계정을 알아내 '신상털기'에 나섰다. 그동안 써온 트위터 글들을 캡처해 올리자, '리얼 빨갱이' '아오지 탄광이나 가라'는 등의 욕설이 쏟아졌다. 이들은 박씨의 글 중에서 '붉게 물든' '투쟁' 등의 단어들을 부각시켰다. 이를 두고 한 학생이 박씨를 '간첩' '종북세력'이라며 국정원에 간첩·좌익사범으로 신고한 것이다. 이들이 문제삼은 글은 '강철 같은 단결투쟁으로 학교 당국 박살내자! 파업투쟁, 승리투쟁' 등이다.

■ 장난처럼 한 북한 말도 '신고'

지난 7월 울산에서는 여중생 2명이 북한 어투로 대화를 하던 청년 2명을 간첩으로 신고했다. 길거리에서 "동무, 얼른 자결하라우"라며 북한 말을 했다는 이유였다. 울산 동부경찰서는 '혐의점이 없다'고 보고 수사를 종결했다. "동무 얼른 자결하라우"는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 나오는 대사다. 청년들이 유행하는 말을 장난으로 나눴던 것으로 본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규탄하는 촛불집회 등을 폄훼하고, 집회를 국정원·경찰에 신고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국정원은 '절대시계'라는 기념품을 주면서 젊은이들의 이런 신고를 독려하고 있다. 절대시계는 국정원에서 기념품으로 지급하는 손목시계다. 인터넷에는 절대시계를 받는 방법이 소개되고, 매매까지 이뤄지고 있다. 공안당국의 '젊은층 우군화' 정책이 사회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먹혀들고 있는 것이다.

■ 진보적 강연에 대해선 '손사래'

고려대는 지난 6일 이 학교 정경대·이과대 학생회와 참여연대 공동 주최로 열릴 예정이던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관련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박주민 변호사의 초청강연회 장소 대관을 돌연 거부했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행사'라는 이유에서다. 강연은 장소를 옮겨 진행됐다.

지난 4월 부산교대 총학생회는 사단법인 청춘멘토와 함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등을 초청, 정치·사회 현안을 논의하는 'R대학' 행사를 열려고 했다. 학교 측은 "교원을 양성하는 기관에서 정치적 색깔이 짙은 행사는 허용할 수 없다"고 장소 제공을 불허했다. 서울 노원구청은 지난 1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초청 특강을 주최했지만 보수단체의 집회 등 압력에 밀려 취소했다. '김일성 항일투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 교수는 '광주 5·18운동 그 후'라는 주제로 강연을 할 예정이었다. 보수단체는 한 교수가 2004년 한 칼럼에서 "20세기 초 김일성은 자수성가형 민족영웅"이라고 표현한 부분을 문제삼았다. 지난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공연한 시립합창단원들이 아르헨티나 혁명가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다는 보훈처장의 지적을 이유로 시가 지휘자 중징계까지 검토하는 일도 벌어졌다.

반면 부산교대는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 발언으로 재판을 받던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학내 강연에 대해 "교직원 대상으로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강연"이라며 허용했다.

■ "이러다 나도 신고당하겠다"

신고로 인한 불안감은 학문 연구에서 일상 생활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책 <맑스주의 역사강의>를 쓴 한형식 당인리 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46)은 "이석기 의원 구속 사건 이후에 임승수씨가 신고당했듯이, 전체 대중에게 좌파 연구자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덧씌워지는 효과가 생기고 장기적으로 관련 연구가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여름 강좌로 마르크스 철학 강의를 들었던 대학생 이정현씨(23·여)는 "주변 친구들조차 '그거 이상한 강의 아냐?'라며 수상쩍은 눈빛으로 묻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해할 수 없긴 했지만, 그 뒤로 강의를 들으러 갈 때면 주변 눈치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대안연구공간 수유너머N의 전성현 연구원(23)도 "마르크스주의와 종북이 동일한 계열처럼 묶여 얘기되면서 점점 공부하는 게 눈치 보인다. 마르스크주의를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사회학과 대학원에 가고 싶지만, 자본론을 강독한 사람들이 고소당하고 자본론을 가르친다고 신고당하는 걸 보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회사원 김상현씨(35)는 "인터넷 게시판에 자유롭게 글을 올리던 예전과 달리 요즘엔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며 "국가권력보다도 더 무서운 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박홍두·김여란·김지원 기자 p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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