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워라, 혐오에 맞서 또 싸워라" 게이 신혼부부 김조광수·김승환 커플

2013. 10. 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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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결혼 20년차 정연순 변호사가 만나다

"(19년 나이차를 두고) 누군가 '나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없는데, 어린 친구를 어떻게…'라고 하더라. 얼마 전 백윤식 선생님이 30살 연하와 연애한다는 소식이 들려 정말 다행이다." -김조광수 "우리만 (가족으로) 인정받으려는 게 아니다. (이성애자들이) '이런 사람들도 가족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의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는 때가 언젠가는 오리라 믿는다." -김승환

지난 9월7일 서울 청계천광장에선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제목은 '김조광수와 김승환의 당연한 결혼식, 어느 멋진 날'. 주인공이 게이 커플이라는 점, 각계각층에서 1천 명이 넘는 하객이 찾았다는 점, 여기에다 오물 투척 사건까지 더해져, 마치 영화 속 한 장면과도 같은 이 결혼식은 두루 화제를 낳았습니다. 세상이 망해간다는 탄식부터 조용히 잘 살기나 할 일이지 왜 소란을 떠느냐는 비난까지….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던 이날 결혼식을 통해, 김조광수·김승환 부부는 그저 익숙함이란 틀 안에서 편안히 지내고 싶은 우리를 향해 사고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고 도발하겠노라 선언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다양한 색깔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존중받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두 사람을 지난 9월23일 한자리로 불러냈습니다.

19살 연하를 낚아챈 김조광수의 비결

-두 사람을 만난다니까 고등학생인 딸과 친구들이 어떻게 19살 연하를 낚아챘는지 비결을 꼭 물어봐달라고 하더라. (웃음)

김조광수(이하 조)

얼마 전 배우 백윤식 선생님이 30살 연하와 연애한다는 소식이 들려 정말 다행이다. (웃음) 어떤 분은 도둑놈이라고, 정말 자기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없는데 어린 친구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따지기도 했다.

김승환(이하 김)

9년 전에는 정말 젊어 보였다. 19살 차이가 날 줄은 솔직히 몰랐고 그저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반했는데 나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웃음)

-김 대표는 아직 만 서른이 안 되었다. 커밍아웃이나 공개결혼 등 너무 상대방에게 맞춘 행보 아닌가.

그렇진 않다. 2006년 <후회하지 않아>라는 영화를 개봉하면서 이 사람이 먼저 커밍아웃을 했는데 그 뒤로 훨씬 밝아지고 더 많은 일들을 해내는 걸 옆에서 지켜봤다. 반면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30대를 맞이한 다른 선배들은 점점 더 외로워져가더라. 뭔가 감추고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느끼게 되고. 그러니까 친구들도 안 만나고 부모와도 멀어지고, 몇몇 게이 친구와 술을 마시며 생활이 점차 폐쇄적으로 되는 거다. 나는 가족과 친구들이 소중해서 그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감성으로나 지식으로나 준비된 상태에서 커밍아웃을 했다. 그래서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결혼식은 원래 이렇게 치르고 싶었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멋진 결혼식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웃음)

개인적으로 기존 결혼제도의 모순 때문에 결혼식을 싫어했다. 결혼하려는 사촌누나들에게도 왜 그런 구렁텅이에 들어가려고 하냐며 말린 적도 있다. (웃음) 그런데 시카고에서 게이 친구들의 결혼생활을 보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내가 생각하던 가부장적 모습이 아니라 두 사람의 개인적 결합이 사회적으로 보장받는 의미의 결혼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공개적인 결혼식은 아니기를 바랐다. 이 결혼식이 갖는 사회적 의미 때문에, 또 그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즐기면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준비 과정에서 참 힘들었다. 많이 싸우기도 했고. "왜 이렇게 나대니?"라고 누군가 옆에서 말하면 "나도 나대기 싫어"라고 답하고 싶었다. (웃음)

-결혼식 제목이 '당연한 결혼식'인데 왜 당연한가.

결혼을 선택할 권리가 이성애자에겐 당연히 주어지는데 동성애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당연한 결혼식'이라고 부름으로써, 왜 동성애자의 결혼식이 당연하다는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었다. 비판적이든 적대적이든 우리 결혼식에 대해 '당연하다'는 말을 쓸 수밖에 없도록….

'당연한 결혼식을 반대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우리를 '가족'으로 불려주는 게 혁명 같다"

-결혼식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는가.

소수자운동에서 중요한 건 사회적 담론화를 통한 인식의 변화다. 이왕이면 결혼식이라는 잔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게 더 좋다고 판단했고 그런 의미에서 성공적이라고 자평한다. 설마 잔치에 와서 재를 뿌리겠느냐는 생각도 있었고….

-그런데 결국 재를 맞았다. (웃음) 당시 기분이 어땠는가.

오물을 투척한 걸 몰랐고 사람들이 끌려나가는 것만 뒤늦게 봤다. 그래서 "동요하지 마세요. 우리는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만약 당시 알았다면 분노가 (얼굴에) 다 드러났을 거다.

나는 직접 봤다. 그때 이 사람이 의연한 태도를 보여서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웃음) 오물을 맞은 합창단원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나니 실제 달라진 게 있나.

1989년 문익환 목사님이 방북했을 때 논란도 많았지만 사람들이 '아, 북한에도 갈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처럼, '아, 동성애자도 결혼을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결혼식 이후로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족'으로 불러주는데, 그게 우리에게는 마치 혁명과 같이 느껴진다.

부모님이 많이 달라졌다. 2011년 초에 부모님께 커밍아웃했는데, 원래는 단계별로 나눠 차근차근 말하려 했다. 그런데 커밍아웃 직후 우연히 결혼 기사가 나갔고, 부모님이 직감으로 아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리셨다. 그때부터는 내가 게이인 게 문제가 아닐 정도였다.

19살 차이인 게 더 문제가 돼서. (웃음)

처음에는 '공개 결혼식은 하지 마라', 그 뒤에는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라' '참석하지 않겠다' '참석하되 의자에 앉지 않고 멀리서 보겠다' 이러셨는데 결국 결혼식에 참석하셨고, 어머니 친구분도 많이 오셔서 축하해주셨다. 우리 부부를 (자신들 자녀) 결혼식에 초대해주신 분도 있다. 그토록 알려지기를 두려워하던 부모님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주변에 말을 해주신다.

-두 사람을 부르는 호칭은 무엇이 좋을까.

많은 분들이 도움말을 주었는데, 그냥 '夫夫'라고 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한자로 '지아비 부'를 써서 부부로 부르기로 했다.

가족이 불러줄 마땅한 이름이 없다. 어머니가 이 사람을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할 때 '새아들'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었다. 우리말에 '새아빠' '새아가' 이런 말이 있으니까. 그런데 아직은 낯선 것 같아 계속 고민이다.

"의료보험·국민연금… 더 많은 문제 생길 것"

-혼인신고도 접수했는데.

법적으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슈를 지속적으로 끌고 가면서 사람들에게 결혼이 동성애자에게 왜 필요한지 꾸준히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거부되면 소송까지 가보려고 한다. 앞으로도 생활하다보면 의료보험에 피부양자로 등재한다거나, 국민연금에 등재한다거나, 세대주로 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중 하나라도 받아들여져, '이 정도는 두 사람에게 해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풀릴 수 있다면 좋겠다.

-복지나 일상생활의 각 단계로 접근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러면 동성애자 부부뿐 아니라 비혼 부부라든지 2인 가구라든지 이른바 '정상 가족' 범위에서 벗어나 그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동성결혼이나 가족제도에 대해서는 아직 다수의 합의가 없지 않는가.

이른바 '정상 가족' 형태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과연 다수인지 묻고 싶다. 그 바깥에 있는 '더 많은 다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만 인정받으려는 게 아니다. '이런 사람들도 가족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은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는 때가 언젠가는 오리라 믿는다.

-국가로부터 보호받는 최소 단위로서 가족 내지 시민 결합을 인정받자는 것인데, 변호사 입장에서 보기엔 순탄치 않아 보인다. (웃음) 아까 문익환 목사님 방북 얘기를 했는데, 이렇게 자꾸 나서서 행동하면 더욱 싫어하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겠는가.

성소수자들도 이런 말을 한다. "너희가 너무 나대니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혐오가 많아진다. 좀 조용히 살아라"고. 어떤 사람들은 홍석천이 쌓아놓은 것을 김조광수가 무너뜨렸다고 말한다. 홍석천은 자기들 생각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으니까 그냥 내버려둬도 되는데 나는 자꾸 침범하는 거다. 우리도 결혼식에 대한 반감이 있을 것이라고, 아니 오히려 반감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자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동성결혼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도 아예 그런 토론 자체가 없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사실 욕도 더 많이 먹고 때론 외롭기도 하다. (웃음) 어쨌든 서로 토론하고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답한다. 꾸준히 혐오와 맞서 싸워야 한다.

-차별금지법이 무산된 것도 그렇고, 배제·혐오 현상이 더 늘어나고 있는 것 같지 않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렌스젠더) 운동의 역사를 봤을 때 우리는 초기 단계를 지나고 있다. 동성애를 인식하지 못하는 시절에는 아예 호모포비아가 없다. 그 존재 자체를 모르니까. 그러다 동성애자가 보이기 시작하면 포비아가 생긴다. 동성애자가 자신의 법적 권리를 쟁취하기 시작하면 포비아도 훨씬 극렬하고 조직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 주장이 근거 없는 혐오에 기반하고 있기에 급격히 약해진다.

(결혼식에) 똥물을 뿌린 행위에 대해 '저건 아니다'는 지적이 많은데 그걸 보면 우리는 초기 단계는 지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혐오'라는 감정에 대처하는 법

-그래도 혐오라는 감정은 쉽게 고치기 어렵다. 그냥 싫다는 걸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문제의 주체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 혐오가 사라지게 하기 어렵다. 이성애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떤 면에서는 다르기는 하나 그것이 당신의 권리를 빼앗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기에 근거가 없는 혐오 감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계속 보여줘야 한다. 동성애자에 대해 잘 모르면서 혐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꼭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부담감은 없는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나도 스스로를 혐오하면서 15살부터 30살까지 살았다. 그때 동성애자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봤다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것이다. 동성애 청소년들을 만나면 첫마디가 "감독님 때문에 꿈을 키우게 되었다"는 거다. "동성애자도 선생님이 될 수 있나요?"라고 묻기도 한다. 그 친구들로부터 "저도 노력하면 될 수 있겠군요"라는 말을 들으면 정말 행복하다.

-두 분은 행복한가. 그런 감정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행복하다. 게이'지만'이 아니라 게이'라서'가 중요하다. 다수자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소수자에게는 정말 큰 행복일 때가 많다. 나는 15년 동안 게이라서 굉장히 불행했다. 자신을 긍정할 수 없었으니까. 다른 소수자들도 마찬가지다. 커밍아웃 뒤 '게이라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순간, '장애인이라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전에는 '어떻게 장애인이 행복해? 말만 그러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자기의 장애를 극복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성소수자는 당연히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게 제일 싫다. 우리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렇다. 소수자이기 때문에 세상의 불합리함을 볼 수 있게 됐다. 보수적인 지방도시에서 자란 남성이 지금의 결혼제도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기 어렵다. 여성보다 더 낮은 처지인 성소수자였기에 나에게는 그것이 보였다.

-요술램프의 지니가 나타나, 두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하나는 나를 위해, 하나는 다른 이를 위해 쓸 수 있다.

LGBT 센터를 지었으면 한다. 센터를 통해 지역 주민과 성소수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만날 수 있는 장을 열고 함께 변화해가는 것을 보고 싶다

사실 우리는 '축의금으로 센터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는데…. (웃음)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것을 바라는가.

이 사람이 더 이상 안 늙었으면 좋겠다. 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에서 이브 생 로랑의 배우자인 피에르 베르게라는 배우가 홀로 남아 재산과 삶을 정리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게 너무 안쓰럽고 가슴에 사무쳤다.

LGBT 센터 건립이 꿈이라는 두 사람

2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 내내 활달하고 밝은 성격의 김조광수 감독과 찬찬하고 당찬 김승환 대표는, 촬영을 위해 입고 온 초록과 빨강의 재킷처럼 무척 잘 어울렸습니다. 우리는 살림살이를 어떻게 하느냐, 영화 개봉 계획은 어떻게 되느냐는 소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인터뷰에 이어 밥집으로 자리를 옮겨선 결혼의 첫걸음을 뗀 신혼부부(夫夫)에게 동석했던 결혼 10년차 기자와 결혼 20년차 변호사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각자의 경험담을 들려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이제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갑니다. 다정히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그토록 평범한 일상을 쟁취한 그들의 잔잔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비록 요술램프의 지니는 없지만, 그들의 소원 중 한 가지가 꼭 이루어지도록 보탤 힘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나는 센터 건립을 위한 기금 계좌번호는 국민은행 408802-01-280403 김승환입니다.

정연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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