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취업 전쟁, 패자들의 비망록

2013. 11. 2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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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기획 연재_ 취업 OTL] 컨설턴트 도움 받아 꾸렸던 6인조 취업결사대"근데 너희들, 내 면접 콘셉트 도용하려는 건 아니지?"

2013년 하반기 대기업 신입사원 공개채용을 앞둔 지난 8월, 이은미(27·가명)씨는 취업 스터디를 시작했다. '독하게 취업하는 사람들'이라는 취업 카페에서 스터디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고 모임에 참석했다. 대학생들끼리 하는 스터디인 줄 알았는데 취업컨설팅업체가 주관하는 자리였다. 석 달간 자기소개서를 서로 첨삭하고 토론 면접을 준비하며 이들은 경쟁자와 동반자를 오갔다. _편집자

이은미 8월4일-스터디 전날 밤

11시, 몇 시간째 네이버 카페만 들락거린다. 자정까지 '일생 스토리'를 업로드해야 한다. 대학에 입학한 2004년부터 분기·학기별로 내가 걸어온 길을 적는다. 벌써 2013년. 9년간의 삶을 온전히 끄집어내기란 불가능하다. 컴퓨터 앞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취업준비생의 숙명. 기업이 원하는 '미래지향적 인재'가 어떻게 되겠는가.

스터디 조원 누구도 아직 스토리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았길 바라는 마음이 내 가슴 한켠에 있다. 밤 11시50분, 하나씩 학교, 학점, 외국어 점수, 인턴 경력, 공모전 입상 경력 등 스펙을 업로드한다. 화려하다. 취업에 임하는 각오도 확고하다. "올인하겠다" "반드시 취업하겠다" "철저히 준비하겠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눈팅만 하다가 자정이 넘어버렸다. '동네 갈빗집에서 아르바이트한 게 언제였더라.' 스펙에 끼지도 못할 아르바이트까지 더듬는다. 야한 농담만 늘어놓던 사장과 하루 종일 뛰어다녀 피가 흐르던 발가락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참을성을 배웠다고 하면 믿을까.'

나중에 스터디 팀원인 지선이 그날을 '목욕탕 가기'에 비유했다. "남들이 먼저 벗기를 기다리다 결국 나도 벗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우리는 발가벗겨졌다.

스펙 좋던 유학파는 떠나고

8월5일-스터디 1일차

오전 10시15분, 여자 5명, 남자 1명이 쭈뼛거리며 앉아 있다. 오전 10시부터 첫 스터디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취업컨설턴트가 나타나지 않는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생각이 스쳐간다. '중국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애가 저 긴 생머리 여자인가. LG전자에서 인턴을 했다는 애가 저 남자구나. 쟤네들도 내 일생 스토리를 봤겠지.'

매주 월·수·금 오전 10~12시 취업 스터디가 2주간 진행된다. 취업컨설팅업체가 커리큘럼을 짰다. 오늘은 자기소개서 첨삭과 기업분석 프레젠테이션(PT), 시사토론을 한다. 나는 스터디룸 대여비와 첨삭비로 9만원을 이미 냈다. 팀원이 6명이니까 취업컨설팅업체는 54만원을 챙겼다. 그런데도 첫 시간부터 하염없이 기다리게 한다.

1시간 늦게 등장한 취업컨설턴트는 자기소개서 작성 요령과 기업분석 방법을 1시간 정도 강의했다. "팀장을 뽑아야 합니다. 앞으로 저와 연락할 일이 많은데 남자가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손을 들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리더 숙지사항을 건넸다. '취업에만 집중하도록 잡담 없이 이끌어주세요. 지각하는 친구를 기다리지 마세요. 스터디 끝나고 컨설턴트에게 바로 보고하세요.'

스터디가 끝나고 컨설턴트가 카카오톡을 보냈다. "수경씨는 다음주부터 다른 팀으로 옮깁니다." 수경은 일생 스토리가 가장 화려했던 25살 유학파 친구다. 고등학교 때 캐나다로 유학갔다. 스페인어를 하고 멕시코와 중국에서 교환학생을 했다. 정부기관과 외국계 기업에서 인턴을 했다. '수준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알 수 없다. 남은 우리는 짐작만 할 뿐이다.

8월7일-스터디 3일차

25살 지선은 대학 졸업 직후 중소기업에 취직했다가 1년6개월 만에 그만뒀다. 부도가 났기 때문이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했지만 월급이 8개월이나 밀렸다.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빨간 딱지를 붙였어. 충격 때문에 며칠간 잠도 못 잤어." 지선의 입술이 떨렸다.

'중소기업의 구인난, 원인은 무엇인가?' 토론 면접을 준비하는 시사토론의 첫 주제였다. 자연스럽게 취업난 이야기로 이어졌다. 취업준비생이 흔히 듣는 말이 있다. '눈을 낮춰라.' 우리는 왜 쉽게 눈높이를 낮출 수 없는가. "제대로 된 기업인지 알기 힘들잖아. 정보가 너무 부족해." 27살 청일점 한솔이 말했다. "중소기업은 주말근무가 잦고 야근수당도 잘 안 나오잖아. 우리나라는 복지도 취약한데 말이야." 중국에서 유학한 23살 보라가 덧붙였다. 이화여대에 다니는 소영은 말한다. "명절 때 집안 어른들은 어디에 취직했느냐고 물어보잖아. '듣보잡' 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무시하고." 중소기업에 자발적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대일 컨설팅 비용이 180만원

8월14일-스터디 10일차 지선이 쓴 자기소개서를 첨삭하려고 한줄 한줄 읽는다. 1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지선이 겪은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 새벽까지 지선은 그 이야기를 쓸까 말까 망설였다고 했다. 눈물로 채운 500자를 우리는 첨삭해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지선이 많이 아프다는 것도, 언니와 함께 살고 전세금 인상을 갑작스레 통보받았다는 것도. 하지만 고통으로 채운 자기소개서는 공채 서류전형에서 외면당했다.

8월27일-스터디 23일차

컨설턴트는 자기소개서를 첨삭하며 끝없이 취업컨설팅을 받으라고 강권했다. "머뭇거리지 마세요. 취직하면 이 돈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컨설팅 비용은 그룹반은 120만원, 일대일은 180만원이라고 했다. 비싼 가격에도 컨설팅업체의 인터넷 카페에는 입금 확인을 부탁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우리끼리 새로운 스터디를 시작했다. 인터넷 카페명은 '취업전선 이상무'. 더 알차게 커리큘럼을 짜고 싶었다. 시사상식 시험, 인·적성 문제집 풀기, 자기소개서 첨삭, PT 발표, 시사토론. 3시간의 스터디가 모자랄 정도로 빡빡했다. 하반기 공채에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무리를 했다.

"이영애가 산소 같은 여자라면, 저는 질소 같은 여자입니다. 원자번호 7의 안정적인 이 원소는 대부분의 물질과 반응하지 않아 전에는 쓸모없는 원소로 알려져왔지만 암모니아로 합성되면서 지구상 식물의 3분의 1을 키우는 비료가 됐습니다." 내가 모의면접 시간에 1분 자기소개를 하는데 소영이 '질소'라고 노트에 적는 게 보인다.

"저는 CJ에서 질소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른 기업들은 몰라도 CJ에만 반응하는 사람, CJ라는 지구 위의 CJ인들이라는 식물들이 풍부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영양분을 제공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모의 면접관인 팀원들이 무작위로 질문을 던진다. "본인의 인생관이 뭔가요." "미국의 영화감독인 우디 앨런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의 8할은 무조건 출석하는 것이다.' 제 인생관과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이번엔 한솔이 내 말을 받아 적고 있다. "합격!" 팀원들이 웃으며 말했다. 차마 물어보지 못한 질문이 내 입안에서 맴돌았다. "질소를, 우디 앨런의 말을 너희가 도용하려는 거 아니지?"

첫 서류 합격자… 나머지는 쓰렸다

9월25일-스터디 53일차

하반기 공채의 서류전형 합격자가 하나둘 발표됐다. 나의 첫 서류전형 결과는 김밥천국에서 혼자 점심을 때울 때 찾아왔다. "한화케미칼 하반기 공채 서류전형 결과 발표. 넷크루트와 이메일을 확인해주세요." 휴대전화 메시지를 읽고 그대로 굳었다. '합격이면 두 글자, 불합격이면 세 글자겠지.' 가느다랗게 뜬 한쪽 눈으로 검정 글자의 흔적을 봤다. "불.합.격." '첫 지원부터 이 모양이면'과 '첫 지원이니까 그럴 수 있어'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다른 팀원의 결과가 궁금하다. 한참 뜸 들이다 카카오톡 채팅창에 썼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한화 쓰신 분들 있나요? 서류 결과 나왔네요." 1분이 10분처럼 느껴졌다. 2분 뒤 한솔이 물었다. "붙음?" 탈락했다고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합격 소식이 채팅방을 덮친다. "아모레 인턴도 떨어졌어요." "저번주에 LG하우시스 떨어졌어요. 술 진탕 마심." "전 얼마 전에 LG상사 발표 났는데 흑흑." 재영이 하반기 채용 인원이 터무니없이 줄었다고 푸념했다. 한솔이 맏오빠답게 말한다. "우리는 될 거야. 겁내지 마. 혼자 끙끙대면 답 안 나온다. 힘들어도 스터디 나오자." 지선이 맞장구친다. "함께하니까 힘난다."

10월2일-스터디 59일차

드디어 첫 서류전형 합격자가 나왔다. 소영이다. 그는 인·적성 시험을 준비한다며 스터디에 빠졌다. "CJ가 이화여대를 좋아한다더니 맞나봐." 스터디를 시작하기 전에 지선이 말했다. 다들 착잡한 표정이다. 팀원 모두 CJ에 지원했다. 소영이 합격하던 날, 우리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카카오톡 채팅방에선 이모티콘을 달며 소영이에게 '축하합니다'를 외쳤더랬다.

카페 통유리 너머로 벌써 노랗게 변한 플라타너스가 보였다. 초조해졌다. '지금 내가 남의 자기소개서를 첨삭해줄 때인가. 내 1분 자기소개를 소영이 해버리는 건 아닐까.' 갑자기 억울해졌다. 다른 친구들도 그랬다. 한솔이 갑자기 CJ 인·적성 문제집을 가방에서 꺼내들었다. "이거 얼마에 팔까?" 죽을상을 짓던 우리는 까르르 웃었다. 문제집을 펼쳐보니 몇 페이지 푼 흔적이 있다. 서류전형 합격자가 발표되기도 전에 한솔은 김칫국부터 마셨나보다. 우리는 '웃펐'(웃기면서도 슬픈 상황)다. 지선이 고백하듯 말했다. "축하한다고 카카오톡에 쓰면서 진짜 속상하더라."

10월24일-스터디 81일차

일주일에 5편씩 자기소개서를 썼다. 컴퓨터 앞에서 끊임없이 과거를 물으며 점점 체력이 떨어졌다. 결국 스터디 모임에 첫 결석을 했다. 한솔이 카카오톡을 보냈다. "푹 쉬고 얼른 회복해라. 아프지 말아야 자기소개서 하나라도 더 쓴다." 그날 스터디는 취소됐다. 다음주도, 다다음주도. 카카오톡으로 서로 안부를 물었다. CJ 서류전형에 합격했던 소영은 인·적성 시험에서 탈락했다. 가장 높은 서류전형 통과율을 보이던 청일점 한솔도 필기전형을 넘지 못했다. 그렇게 '2013년 하반기 대기업 신입사원 공개채용'이라는 전투에서 우리는 전패했다.

왜 패배했을까. 학벌, 전공, 나이, 성별, 어학 점수 때문에? 컨설턴트는 이렇게 말했다. "취업은 운칠기삼이다. 떨어졌다면 '왜'를 생각하지 말고 잊어라.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알려 하지 마라."

그래도 '우리'를 얻었다

스터디 그 후

한솔·지선·소영·미연·보라 그리고 나. 취업 전선에서는 패배했지만 우리는 우리를 얻었다. 공채가 끝난 11월 초, 스터디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술자리를 가졌다. "고백할 게 있어." 내가 말했다. "결혼해?" "합격했구나!" 지선과 한솔이 물었다. "그게 아니라 우리 취업 이야기를 기사로 쓰려고 해. < 한겨레21 > 인턴기자로 일하고 있어." 놀라서 다들 말이 없다. 살짝 두려워졌다. "기사 꼭 잘 써줘, 생생하게." 지선의 말에 다른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우리는 얘기했다. 지선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할까 말까 망설였다. 소영은 졸업 유예를 선택했다. 한솔은 일단 어느 곳이라도 취직을 할 거라고 했다. 이직을 하더라도 말이다. 너무나 지쳐 보이는 23살 미연은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나도 '취업 OTL'을 쓰고 나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거다. 인생은 계속되니까.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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