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제사 초저녁에" 종가 제례 간소화 혁명

대구 2014. 1. 1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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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자정 넘어 지내던 이황 선생과 두 부인불천위제사 오후 6시로 옮기기로 문중 운영위가 결정영남 지역 등 다른 종가들 제사 풍습에 큰 변화 예고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종가가 수백년 동안 자정을 넘겨 지내던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초저녁으로 전환, 종가에 파장이 일고 있다. '위패를 옮기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천위는 큰 공이 있거나 도덕성 및 학문이 높아 4대가 지나도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인물의 신위를 말한다.

퇴계 종가의 문중의결기구인 상계문중운영위원회(이하 문중운영위)는 지난 7일 퇴계 불천위 제사를 위해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종택에 모인 자리에서 참석자 65명 만장일치로 내년부터 불천위 제사를 오후 6시에 지내기로 의결했다.

문중운영위는 수년 전부터 제사 간소화를 추진했지만 불천위인 퇴계와 두 부인의 제사만큼은 자정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이번 결정에 따라 오는 7월28일(음력 7월2일) 퇴계의 권씨 부인 제사와 내년 퇴계 불천위 제사는 초저녁에 지내게 된다.

수백년간 이어져 온 퇴계 불천위 제사시간 변경이 쉽지는 않았다. 3년 전인 2011년 문중운영위가 구성된 후 제사 간소화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예법을 정립한 분이 퇴계인데 종가가 스스로 이를 저버릴 수 없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하지만 "퇴계 선생은 '그 시대의 풍속을 따르라'고 가르쳤다"는 간소화 논리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다 이날 회의에서 제사 간소화에 가장 강경하게 반대하던 한 운영위원이 "시대의 흐름과 다수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발언, 퇴계 불천위 제사시간 변경안은 거짓말처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날 결정으로 우리나라 제사 문화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당장 영남지역 종가 중 상당수가 제사 간소화에 동참하고 전국적으로도 보수 성향의 가정이 뒤를 이을 것으로 보인다. 영남지역 종손 모임인 영종회 김종길(74ㆍ학봉 김성일 선생의 15대종손) 회장은 "영남지역 120개 불천위 종가 중 아직도 절반 정도가 자정 이후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종가의 맏형 격인 퇴계 종가가 간소화에 나선 만큼 다른 종가의 제사풍습에도 일대 혁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결정으로 퇴계 종가와 문중이 유교적 보수주의로만 뭉쳐있을 것이라는 세간의 짐작은 보기 좋게 깨졌다. 퇴계 종가는 '종손 말이 법'으로 통하는 종가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2011년 문중운영위를 구성했다. 스스로 권한을 내려놓은 것이다. 고문 32명과 운영위원 63명, 회장단 46명 등 문중 관계자 210명으로 구성된 문중운영위는 종손을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퇴계 문중 최고 의결기구로 떠올랐다.

퇴계 문중은 또 2002년 4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백년간 금녀(禁女)의 영역이던 도산서원 상덕사에 여성 참배를 허용, 남녀 차별에도 개혁의 메스를 들이댔다. 상덕사는 퇴계 선생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퇴계의 16세손인 이근필(82) 종손은 "내가 죽으면 납골당에 가겠다"고 말했고, 17세손인 이치억(38)씨도 "제사가 간소화되지 않으면 종가의 미래가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 퇴계 종가의 개혁이 몰고 올 파장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대구=전준호기자 jhjun@hk.co.kr안동=이임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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