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점규의 노동여지도]직영 아빠와 하청 아들, 서글픈 도시 창원

2014. 10. 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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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삼촌과 계약직 조카가 함께 일한다. 직영과 하청은 하늘과 땅이다. 정규직 일자리가 없는 부자도시 창원의 슬픈 자화상이다.

시내버스가 창원대로를 달린다. 현대위아 네거리, 공단으로 향하는 출근길 발걸음이 분주하다. LG전자, S&T중공업, 대원강업이 이어진다. 1974년 만들어진 창원국가산업단지. 5층짜리 사택의 낡은 담벼락이 공단의 40년 나이테다. 부산포금(현 PK밸브)을 시작으로 금성사(LG전자), 기아기공(현대위아), 효성중공업이 차례로 들어와 현재 1877개사 7만9867명이 일하고 있다. 버스가 공단을 지나 상남동으로 향한다. 한화 꿈에그린을 비롯해 초고층 아파트들이 곳곳에서 위용을 뽐낸다. 강남 다음으로 집값이 비싼 도시. 5억짜리 34평 아파트에 살 수 있는 노동자들이 울산만큼이나 많은 동네가 창원이다.

아침 8시40분, 상남동 노동복지회관 4층 회의실에 야간일을 마친 40여명의 아저씨들이 모여 김밥을 먹는다. 전날 피엔에스알미늄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김태희가 광고하는 회사다. "저도 누군가 해주길 바랐습니다. 누군가 앞장서면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인간적으로 대우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조지회장으로 선출된 홍희균씨의 목소리가 떨린다. 남들보다 27년 늦게 태어난 노조. 지회장은 "아, 우리도 할 수 있구나. 왜 진작 못했을까"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석 달의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띄운 노조에 120명 중 100명이 가입했다. 회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국에서 노조를 만드는 일은 독립운동에 가깝다. "헌법에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있어요. 우리는 평생 직장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임금을 계산하는 법도, 노조를 만드는 법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금속노조 문상환 부장의 얘기에 노동자들이 귀를 쫑긋 기울인다.

금속노조 현대로템지회 파업현장. | 박점규

27년 늦게 태어난 노조

창원병원 사거리를 지나 다시 공단으로 향한다. 19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 1997년 정리해고제 도입을 막기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 때 가두투쟁이 벌어진 곳이다. 울산과 함께 노동운동의 메카로 불렸던 마산과 창원, 노동정치 1번지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변압기를 만드는 효성중공업 노조사무실이 분주하다. 임금협상 기간이다. 월급을 2만4000원 올려주겠다는 회사 제시안에 조합원들 분노가 '빵' 터졌다. 지난해에도 적자라고 해서 노조가 양보했는데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10년간 8000억원대의 탈세와 횡령, 배임 등 기업 비리를 저질렀다는 뉴스가 떴다. 노조 교섭 속보에 적힌 구호가 '효성동지 굶주려도 경영진은 호화천국'이다.

30대 초반 젊은 노조 간부들이 활기에 넘친다. 지인의 소개로 하청업체 창일전기에 들어왔다가 2008년 정규직이 된 심영보 홍보부장은 1980년생이다.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인 2007년부터 신규채용을 해서 신입사원이 많이 늘었다. 조합원 800명 중 아버지와 아들 세대가 반반이다. 다른 회사들처럼 효성도 정규직을 줄여나갔다. 그런데 대형 불량사고가 터지고, 기술전수가 안 되면서 직영을 뽑기 시작했다.

하지만 효성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 3700명 중 정규직은 1000명뿐이다. 사내하청이 2300명, 계약직이 400명이다. 직영 아버지와 하청 아들, 정규직 삼촌과 계약직 조카가 함께 일한다. 직영과 하청은 하늘과 땅이다. 30대 초반이지만 주야간 일하면 연봉 5000만원은 받을 수 있다. 심 부장은 "재수 좋으면 정직원이 된다는 얘기가 들리니까 일용직이라도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많다"며 "사람들이 노동조건이 열악한 하청업체를 기피하니까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얍삽하게 홍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장 순회를 마치고 나온 조장열 수석부지회장은 아버지 세대다. "50대 조합원들이 자신이 그만둘 테니 아들을 넣어달라고 합니다. 노조에서 회사에 요구하면 될 수도 있지만 잘못된 요구를 할 수는 없죠." 회사의 막내 김병준 문화체육부장은 노동자 대투쟁과 나이가 같은 1987년생이다. 마산상고 야구부 1번타자 출신인 그는 아버지 사업 실패로 운동을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공장 가서 뭐할래" 하던 친구들이 지금은 자기도 좀 넣어주면 안 되냐고 말한다. 정규직 일자리가 없는 부자도시 창원의 슬픈 자화상이다.

노조의 안내로 안전모를 쓰고 현장을 둘러본다. 대형변압기 정전판을 만드는 공정에서 정규직 6명과 계약직 5명이 함께 일한다. 변압기 마지막 공정으로 옮긴다. 한 변압기에 4~5명씩 4개조가 조립을 한다. 정규직과 계약직이 섞여 있다. 조립된 변압기는 실험실을 거쳐 해체 공정으로 이동한 후 납품한다. 하청업체 담당이다. 불법파견을 피한답시고 분리해 놓았는데 조립과 해체 공정 거리가 불과 5m다. 지난주 법원은 "연속된 업무를 수행함에 따라 그 작업 결과가 혼합되어 누구의 작업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구별이 곤란하다"며 현대차의 모든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다. 이 변압기는 직영과 하청, 누구의 작업 결과일까?

점심시간, 식당 줄이 유난히 길다. 몇 년째 식당 증축을 요구했는데 "공장에 일하러 오지 밥 먹으러 오냐"는 것이 회사 고위층의 대답이다. 밥에 쥐똥이 섞여 나와 식판을 집어던지며 싸우던 시절이 옛날 일만은 아니다. 업체마다 다른 색색의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긴 줄을 기다려 밥을 먹는다. 직영은 카드를 찍고, 하청은 식권을 낸다. 하청의 설움을 먹는다.

피엔에스알미늄 노조설명회. | 박점규

변압기 조립은 직영, 해체는 하청

국내 최대 베어링용 쇠구슬 생산업체 KBR. 주차장 천막에서 점심 설거지가 한창이다. 그늘막에서 노동자들이 담소를 나눈다. 회사는 지난 5월 10일 '과도한 임금인상과 보수를 위한 기계 출고에 대한 불법적인 파업'을 이유로 직장을 폐쇄했다. 14년차인 주형환 사무장의 연봉은 잔업을 100시간씩 해서 3800만원이다. 기본급이 최저임금보다 500원 많다. 한화기계 창원 2공장이었던 회사가 2004년 한화그룹 비자금 사태와 대한생명 인수로 지금 경영진에게 팔렸다. 마산고와 고대를 나와 부동산업으로 돈을 번 이종철 회장 일가는 매년 5억원가량을 챙겼고, 2년 동안 20억원을 배당금으로 가져갔다. "어제 교섭을 했는데 근로감독관이 있는 자리에서 '2년이고 3년이고 가자. 없는 니네가 얼마나 버티겠냐'고 말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 저는 '2년 가지고 되겠나, 한 5년 가자'고 답했죠." 박태인 지회장이 울분을 토해낸다. 회사가 밀양에 만들어놓은 삼경오토텍을 다녀왔는데 대부분의 생산공정이 사내하청이었다. 임금협상 때마다 외주화를 협박하더니 노동자들 몰래 밀양에 비정규직 공장을 만들어놓고 기계를 빼돌리려는 속셈이었다. 노조를 없애고 창원의 명당자리를 팔아 돈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명문학교병' '땅투기병' '노조혐오증'이라는 3대 중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은 나라다. 이들의 그릇된 아들 사랑은 극진하다.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모든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법원 판결은 무시하고, 감정가의 3배가 넘는 10조5500억원으로 한전 땅을 사서 아들에게 물려준다. 빌 게이츠도, 스티브 잡스도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줬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노조는 자동차의 품질에 심각한 우려를 제기한다. 회사가 밀양에서 만든 미승인 볼을 KBR에서 제작한 것처럼 속여 베어링회사와 자동차 부품공장에 납품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박스갈이'다. 품질이 떨어지는 볼로 인해 자동차의 품질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다. 국민의 생명보다 이윤이 먼저인 나라, 대한민국 전체가 세월호다.

전차, 전동차, KTX를 만드는 현대로템. 방문절차가 까다롭다. 창원공단에서 최고로 치는 회사의 지난해 평균 연봉이 8600만원이었다. 24개 업체 627명의 하청노동자가 일한다. 아버지가 퇴직하는 조건으로 아들을 채용해달라는 조합원들의 요구로 2009년부터 3년 동안 37명의 아버지가 나가고 아들이 들어왔다. 명문대 법대를 중퇴하고 아버지 대신 들어와 용접일을 하는 아들도 있고, 아들을 위해 퇴직 후 하청업체로 들어와 일하는 아버지도 있다. 이상호 교육부장은 "5년 일찍 퇴직하면 어림잡아 5억 이상 손해를 보는 건데, 자식이 하청업체에서 거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양보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들이 조합활동 앞장서지 마라, 중간에 서라, 휩쓸려 지나가라,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마라며 나쁜 것만 가르쳐 지난해부터 대체채용이 중단됐다. 현대차·기아차노조도 장기근속자 자녀 가산점을 요구했다.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고, 신규채용을 늘리도록 요구해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일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하는 대기업 늙은 노동자들. 그릇된 자식 사랑은 사용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용자는 기업 세습, 노동자는 고용 세습

현대로템 노조회의실이 철야농성장으로 바뀌었다. 통상임금 정상화와 노동시간 단축이 주된 요구다. 잔업까지 하루 10시간 근무를 9시간으로 줄이자는 것. 노조 상근자 모두가 10일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이날도 2시간 파업을 하고 1200명이 집회에 나왔다. 집회 3회 이상 불참자 실명 공개 등 노동조합의 단결을 해치는 행위는 징계한다. 창원공단에서 조직력이 가장 좋은 노조다.

이상호 교육부장은 만 59세다. 58세 정년에 촉탁직 1년, 계약직 1년이니까 내년 말이면 영원히 회사를 떠난다. 1985년 3월 25일 입사해 꼭 30년을 일했다. 나가기 전에 주변 정리도 하고 쉬고 싶기도 했지만 지회장의 간청에 마지막 봉사를 하고 있다. 1988년 노조활동으로 감옥에 간 동료 면회도 가고, 파업하는 노조 지원도 가자며 '동지 후원회'를 만들었는데 부서마다 생기면서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는 빨갱이로 몰렸고, 목장갑을 가지고 나갔다는 이유로 해고됐다가 2년 만에 복직됐다. 회사 창립일 체육대회 때 정몽구 앞으로 200명을 끌고 가서 시위를 벌인 일, 해고 기간 슈퍼마켓을 하면 평생 먹고 살 거라며 회사가 건넨 돈을 뿌리친 일, 어용노조와 회사가 마창노련 탈퇴 찬반투표를 벌이는 날 홍보물을 만들다 2층에서 뛰어내려 도망간 일, 출근하면서 그 홍보물을 앞 사람에게 건네고 빈 가방을 들고 들어와 투표 직전에 뿌려 탈퇴를 막은 일을 들려준다. 30년 인생을 바친 민주노조. 그의 얼굴이 빛난다. 아름다운 황혼이다.

상남동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금속노조 사무실에 두산중공업 해고자 강웅표 문화체육부장이 일하고 있다. 1982년 9월 한국중공업에 입사해 1985년 노조를 만들려다 해고되고 구속되고, 복직하고, 1998년 민영화를 막으려다 구속되고, 2003년 구조조정을 막으려다 해고되고 구속됐다. 같은 해고자인 김창근 전 위원장은 정년이 지났고, 그는 4년 남았다. 노조는 명예퇴직을 거론하고 있지만 '복직 없이 정년퇴직 없다'는 게 두산중공업 해고자 4인방의 마음이다. 금속노조에서 가장 나이 많은 부장인 그는 문화패를 만들어 수요일마다 세월호 촛불공연을 하고, 밀양 동화전마을 연대의 밤도 열며 열정적으로 활동한다. "늙은 부장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젊은 노조 간부들도 열심히 하려고 한다"며 해맑게 웃는다. 멋있는 황혼이다.

정병산 등산로 입구의 식당. 민주노총이 불매운동을 하는 생탁 대신 금정산성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킨다. "삼성전자서비스 젊은 친구들이 노동조합이 따낸 것도 없는데 좋은 게 뭐냐고 하니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좋다'는 거야. 또 같이 일하는 동료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는 거야.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 노동사회교육원 김정호 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두산모트롤에서 퇴직하고 초등학생에게 비폭력 대화 교육을 하고 있는 최은석 선배는 앞으로 노조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감교육을 해보겠다고 말한다. 직영 아빠와 하청 아들의 도시, 우울한 창원에서 작은 희망을 본다. 짙은 여운을 남긴 서울행 마지막 열차가 창원공단을 떠난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cco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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