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라 일해도 제자리" 해외로 떠나는 '코리아 난민'

이원광 기자 2015. 9. 30.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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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미래 없다? 코리아 난민①]노동강도 높지만 '삶의 질' 나빠..무너진 계층사다리·사회관계망도 원인

[머니투데이 이원광 기자] [편집자주] 취업, 연애, 결혼, 출산에 이어 인간관계와 집, 꿈과 희망까지. 포기할 것이 점점 늘어가는 이른바 'n포세대'들 사이에서 '한국이 싫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현실을 풍자한 '헬조선', '지옥불반도' 등의 신조어도 n포세대의 좌절감을 반영한 슬픈 자화상이다. 이에 따라 '한국이 싫다'며 심지어 이민까지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 한국 사회의 미래 경쟁력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 머니투데이는 '코리아 난민' 시리즈를 통해 이들이 한국을 떠나려는 원인을 진단하고, 탈출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한국에 미래 없다? 코리아 난민①]노동강도 높지만 '삶의 질' 나빠…무너진 계층사다리·사회관계망도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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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37)는 10여년전 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까지 했으나,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에 시달렸고 월급은 200만원에 미치지 못했다.

불안한 미래는 A씨를 더욱 힘들게 했다. 열심히 일해도, 비싼 집값을 고려하면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행복한 삶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A씨는 미련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A씨는 한인이 운영하는 중소 규모의 회사를 거쳐 현재 뉴욕의 한 IT 회사에 취직했다. 오후 5시면 직원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 밤 늦게 이어지는 회식은 없었다.

집 걱정도 덜했다. A씨는 월세 100만원의 아파트를 친구와 나눠 쓰고 있다. 월 400만원의 소득을 고려하면, 주택비가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부지런히 일한 만큼 자리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부모님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지만, A씨는 당장 그럴 계획이 없다. A씨는 "예전처럼 박봉에, 쉬는 시간 없이 일할 것 생각하면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며 "똑같이 일해도 한국에선 절대 이렇게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직 물리치료사 박모씨(31)는 지난해 4월 호주로 떠났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국내 병원에서 근무했으나 비전이 없다고 판단, 퇴직하고 호주 생활을 시작한 것.

열악한 근무조건은 박씨를 지치게 했다. 박봉에 밤낮 없이 일하는데, 고용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직업에 대한 편견도 박씨의 호주행을 부추겼다. 박씨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 현실은 다르다"며 "물리치료사가 단순히 마사지하는 직업으로 여겨지고, 심지어 '의사 보조'라는 얘기도 있었다"고 한숨지었다.

호주에서는 최저임금이 한국의 2.5배에 달해 아르바이트만 해도 대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박씨는 "유학 생활을 통해 물리치료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충분히 쌓고 싶다"며 "영주권을 취득해 호주에서 생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세계 각국에서 난민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고된 직장생활에 지쳐 한국을 떠나는 '코리아 난민'이 늘어나고 있다.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 등 열악한 근무 환경과 열심히 일해도 향후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불안 속에서 이같은 선택을 한다는 분석이다.

29일 이춘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올해 7월까지 한국 국적포기자 수는 모두 5만2093명으로 한해 평균 1만9000명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중 72%(3만7682명)가 북미 지역을 선택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2만9168명)이 1위를 기록했고, 캐나다(8514명), 중국(6095명), 일본(3238명) 순이었다. 반면 같은 기간 한국으로 귀화한 외국인은 2만9506명이었다.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국적을 포기한 사람이 취득한 사람의 2배 가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지표로 보인다.

'탈(脫) 한국'의 원인은 비단 물질적 성취의 한계 뿐만이 아니다. 삶의 '만족도'로 대표되는 각종 비물질적 가치의 빈곤 역시 한국 탈출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복지포럼 9월호에 게재된 'OECD BLI(Better Life Index) 지표를 통해 본 한국의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소득과 자산, 직업과 소득, 주거 등으로 평가하는 물질적 삶의 측정영역에서는 36개(OECD 34개국+브라질·러시아) 국가 중 20위였다. 반면 건강상태, 일과 삶의 조화, 교육과 기술, 사회적 관계 등 비물질적 가치를 포함한 삶의 질은 이보다 9계단 낮은 29위에 머물렀다.

이는 물질적 삶의 조건에 비해 정신적 삶의 질이 우위를 보이는 복지 선진국과 반대 양상의 결과다. 세부적으로 사적지원관계망 순위는 1년 전의 34위에서 조사 대상 중 최하위인 36위로 떨어졌고, 11점 척도(0∼10점)로 구성된 삶의 만족도 점수도 지난해 6.0점에서 올해 5.8점으로 하락, 25위에서 29위로 내려갔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삶의 질이 중요한 가치로 꼽히면서 청년 세대들을 중심으로 한국을 떠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더욱이 어려운 환경에서 노력해도 향후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일명 '계층 사다리'의 붕괴현상은 이같은 현상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OECD 가입국 중 한국은 노동시간이 가장 길지만 고용은 불안하고, 주택비, 사교육비 등을 고려하면 안정적인 소득 확보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외에서 이런 노력이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이 동반돼 이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묻지마식 이민'은 포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 교수는 "해외에 직접 가보거나 온라인상에 공개된 정보들을 통해 해외를 둘러볼 기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이라며 "우리의 현실과 해외 선진국을 비교하면서 타국에서의 삶을 꿈꾸는 일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도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한국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극단적인 시각이 반영된 현상"이라면서도 "미국과 캐나다 등 희망과 기회가 더 많은 듯이 보이지만 노동자들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에 준비 없이 무작정 떠나면, 예상치 못한 어려운 현실에 부딪힐 수 있다"고 말했다.

이원광 기자 demi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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