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산남은 없는데 염산녀는 있다?

장슬기 기자 입력 2015. 10. 2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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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캣맘, 트렁크녀, 상간녀, 이들이 여성인 게 중요한가? 본질을 왜곡하는 사건 규정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성폭행녀’를 검색하면 별다른 특징 없이 정보들이 뜨지만 ‘성폭행남’을 검색하면 ‘성폭행범으로 검색하시겠습니까?’라고 검색어를 제안 받게 된다. 성폭행범이 주로 남성이라는 측면을 강조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폭행녀’를 검색했을 때 ‘성폭행피해자로 검색하겠느냐’는 검색어 제안은 없다.  

국가기간뉴스통신사 연합뉴스는 남성과 여성을 표기하는 방식이 다르다. 지난 18일 연합뉴스는 <전 부인 흉기 폭행 60대 경찰 검거 후 사망>를 보자. 이 기사는 “18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 14일 오전 8시께 수원시 팔달구의 한 주택가에서 김모(66)씨가 전 부인 A(57·여)씨에게 흉기를 수차례 휘둘러 다치게 한 뒤 달아났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성별 표기를 여성에게만 한다. 연합뉴스 등 통신사가 사건의 첫 보도를 담당하고 통신사를 통해 알려진 보도 내용을 대중이 기억하게 되므로 통신사의 보도는 중요하다. 

남성은 곧 일반적인 인간으로 분류되지만 여성은 특별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반영된 사례들이다. 남성은 ‘둘 이상의 성 중에서 하나의 성’이 아니라 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 사진=pixabay
 

지난 8일 경기도 용인의 한 아파트에서 50대 여성이 벽돌에 맞아 세상을 뜬 사건은 ‘캣맘 사망 사건’이라고 알려졌다. 피해자는 정기적으로 고양이의 밥을 챙겨준 것이 아니라 ‘캣맘’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지만 고양이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분노가 담긴 관점에서 적절치 못한 사건 이름이다. 더구나 사건의 본질은 ‘캣맘’이 아니라 ‘벽돌에 사람이 죽은 것’이다. 여성이 피해자임에도 부각되는 현상은 가해자를 은폐하는 효과도 낳는다. 

시민들의 항의로 지난 18일부터 경향신문, JTBC 등은 ‘캣맘 사망사건’을 ‘벽돌투척 사망사건’으로 바꿔 보도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사건을 최초 보도한 연합뉴스의 기사 제목은 '고양이집 만들던 50대 캣맘, 떨어진 벽돌에 맞아 사망'이었다. 용의자가 잡히지 않았다고 하지만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가 등장하자 이는 곧 사건의 이름으로 규정됐다. 

이런 현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두순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은 ‘나영이 사건’으로 알려져 ‘조두순 사건’으로 불리지 않았고, 김일곤이 30대 여성을 살해하고 트렁크에 가둔 뒤 방화한 사건은 민영통신사 뉴스1이 ‘트렁크녀 사건’으로 명명하면서 ‘김일곤 사건’으로 불리지 않는다. 

 
 
▲ SNS에서는 SBS가 유독 여성을 특정하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는 비판 여론이 있다. 사진=트위터 이용자 @yapyap88 화면 갈무리
 

유명한 사건에 여성이 연루되면 ‘~녀’로 불리지만 ‘~남’으로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성이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면 상대 여성은 ‘상간녀’로 낙인찍힌다. 헤럴드경제 지난달 26일자 보도 <남편 상간녀 본 조강지처…>, 미디어펜 지난 2월17일 보도<탁재훈 아내 이효림 “상간녀 산부인과…> 등을 보면 외도의 주 행위자는 남성이지만 여성만 특정된다. 심지어 네이버에 상간녀를 검색하면 ‘상대간통녀’가 아닌 ‘상습간통녀’(꽃뱀)로 검색어 제안을 받는다.  

비슷한 범행이 연이어 발생할 때 여성 가해자만 특정하기도 한다. ‘워터파크몰카녀’가 한 예다. 30대 여성이 유명 워터파크 여성 샤워장에서 다른 여성들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 지난 8월 붙잡힌 사건이 있었는데 남성 공범도 있었다. 인터넷에는 그녀의 사진 등이 공개되며 그녀는 ‘워터파크 몰카녀’로 낙인찍혔다. 그동안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화장실 등에 몰카를 설치했던 남성 용의자들과 같은 수준의 비난이 아닐뿐더러 이 사건은 여성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 하나만으로 몰카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 됐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염산테러를 미러링(남성의 여성차별을 거울로 보여주는 것처럼 성만 바꿔 여성이 남성에게 보여주는 것)한 글이 올라왔다. 남성들이 여성에게 염산 테러를 자행해도 ‘충격적인 사건’쯤으로 스쳐지나가는 현실을 보고 한 누리꾼이 ‘자신이 여성인데 남자친구 얼굴에 염산을 뿌렸다’는 글을 올렸다. 글쓴이는 곧 ‘염산녀’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염산녀’가 된 누리꾼이 올린 글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여성에 대한 언어폭력이 차별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올린 글이었을 뿐이다. 

사건을 처음 보도하는 통신사를 통해서만 이런 용어가 확산되는 것은 아니다. 시사인은 지난 15일 카드뉴스를 통해 코레일을 상대로 간접고용의 부당함과 싸우고 있는 KTX 해고승무원들의 소식을 알리며 이들을 ‘철도의 꽃’, ‘비정규직의 꽃’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경우에 따라 여성을 대상화해 ‘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성희롱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명명 과정에 ‘악의’는 없어 보인다. 프레시안은 집주인인 싸이와 세입자인 카페테이크아웃드로잉 사이의 분쟁 관련 보도를 가장 많이 해왔다. 싸이 측이 법적인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언론플레이를 하는 가운데 약자인 테이크아웃드로잉 운영진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하지만 지난 14일 프레시안은 싸이 측이 카페 운영진 중 한명의 집을 무단 침입한 사건을 알리며 “카페 드로잉 운영진인 독신녀 집을 싸이 측이 무단 침입했다”고 보도했다. 피해자가 여성이며 그 여성이 혼자산다는 것을 부각하는 불필요한 표현이다.  

가해자-피해자가 남녀의 구도가 아닐 때도 이런 현상은 나타난다. 남성 간 살인 사건이었던 ‘윤일병 구타살해사건’에는 남성을 특정하는 단어가 없다. 그러나 지난 2010년 12월 10대 후반 여성들이 편의점에서 담배를 팔지 않는다며 여성 종업원을 때린 사건은 ‘편의점 폭행녀’로 보도됐다. 

남성이 피해자이고 여성이 가해자인 사건은 어떨까? 지난해 10월 술에 취해 잠든 남편을 아내가 살해한 ‘타워팰리스 살인사건’이 있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사건인데 이 사건은 남편이 모텔을 운영했다고 ‘모텔남 살인사건’이 되거나 가정폭력을 저질렀다고 ‘가정폭력남 살인사건’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불려선 안 된다.

 
 
▲ 사건의 진실여부와 관계없이 여성만 특정되는 현실을 꼬집은 SNS 여론. 사진=트위터 이용자 @SarkSark2 화면 갈무리
 

언어는 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원인이다. SBS 소속 한 아나운서의 특정 입모양 화면을 유포하며 ‘뽀뽀녀’라고 이름 짓고 유통되는 건 보편인권에서 여성이 쉽게 배제되는 현상의 한 사례일 뿐이다.

사건의 이름을 어떻게 붙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정한 기준은 없지만 차별을 담아서는 안 된다. 지난해 4월16일 세월호 침몰 소식을 전달한 언론은 이 사건을 ‘진도 여객선 침몰 사건’으로 불렀다. 사건이 발생한 공간(진도)이 아니라 사건책임 주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몇 주가 지나면서 ‘세월호 참사’가 됐다. 사건을 어떤 언어로 규정할지의 문제는 누구를 드러낼 것인가, 누구의 책임을 물을 것인가인 동시에 누가 차별 당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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