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허기진 군상] (5) 빚 권하는 사회-"방 얻으려 200만원 빌린 게 1000만원.." 청년은 출발부터 '족쇄'

이혜리·김상범 기자 2015. 10. 2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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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초년생 한민규씨 이야기

“흔들바위 아세요? 커다란 돌덩이를 가슴 안에 올려두고 사는 기분이에요. 돈에 쫓기다 보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흔들바위가 내려앉는 것 같아요. 제가 옛날에는 밝고 잘 웃었어요. 지금은… 웃지를 못해요, 자꾸 초췌해지고. 빨리 갚아야 되는데….”

지난 16일 서울 신림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민규씨(가명·23)의 겉모습은 다른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게임 캐릭터 머리 위에 화살표가 떠 있잖아요. 제 머리 위에도 ‘대출 1000만원’이라는 말풍선이 떠 있는 것 같아요. 빚 없는 사람들과 저를 구별하는, 다 갚기 전엔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이라고 했다.

지방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소에서 일하던 한씨는 코미디작가가 되고 싶어 그때까지 모은 300만원을 들고 지난해 9월 상경했다. SNL(케이블방송의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병재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몇몇 방송사 공채에서 낙방하자 생계가 막막해졌다. 고졸인 한씨가 구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한 카드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한씨는 “영업엔 소질이 없어서 실적이 거의 없었어요. 처음 대출을 받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어요”라고 말했다.

150만~200만원 월급은 서울에 의지할 곳 없는 한씨가 살림을 꾸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4평짜리 원룸 보증금 500만원을 만들려고 올해 초 한 대부업체에서 2년 상환조건으로 200만원을 빌렸다. 이자는 연 34.9%였다. ‘이자가 비싸 봐야 얼마나 되겠나, 일해서 갚으면 되겠지’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TV에 광고도 자주 나오니까 ‘다들 받는구나’라고 쉽게 생각했다.

이자 납부일은 칼같이 돌아왔다. 대부업체 가상계좌가 적힌 문자메시지를 처음 받고서야 한씨는 ‘나도 빚쟁이가 됐구나’하고 실감했다. 납부해야 할 금액은 이자와 원금을 합쳐 30여만원. 한 달치 월세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아무리 아껴 써도 납부일을 꼬박꼬박 지키려다 보면 통장은 마이너스가 됐다. 연체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납부일만 되면 대부업체에서 전화와 문자가 몇 통씩 왔다. 고객 앞에서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하루에 적게는 2~3번, 조금만 이체가 늦을 기미가 보이면 최대 8번까지 연달아 독촉 문자가 날아왔다. 휴대폰 울리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적성에 맞지 않는 영업을 그만두고 콜센터 아웃소싱업체에 취직했다. 카드사나 저축은행에 용역으로 고용돼 고객들에게 대출을 권하는 일이었다. 하루에도 수백통씩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카드 한민규입니다. 회원님, XX카드 보유하고 계신데 실적이 좋으셔서요, 저희가 낮은 금리로 제공해드리는 금융상품이 있는데…’ 상냥한 말투로 고객한테 ‘돈 빌리라’고 권했다. “정작 빚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사람은 난데, 고객한테 빚을 지게 해야 제가 사는 거죠.”

악순환이 시작됐다. 주말에는 회사가 쉬었기 때문에 급여는 영업사원 때보다도 적었다. 적은 급여로는 생활비와 월세를 대기도 빠듯했다.

이자와 원금을 제때 내려고 대출받고, 불어난 이자를 감당하려고 또 대부업체를 찾았다. 연체보다 신용등급 떨어지는 게 더 무서웠다. 카드사에서 일하는 한씨는 연체 기록이 쌓여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미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린 것만으로 신용등급이 두 단계 떨어진 상태였다.

8개월 동안 3곳의 대부업체에서 총 1000만원을 빌렸다. 이곳저곳에서의 독촉 연락에 시달리다 대출금을 한군데로 묶기 위해 대출 알선업체를 찾았다. 한씨는 “한꺼번에 1000만원을 빌리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안돼요. 그런데 (알선업체가) 대출에 필요한 서류를 ‘가짜’로 꾸며줄 테니 달라는 수수료가, 따져보니까 대출금의 절반이 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나왔는데 생각해 보면 제가 얼마나 막장에 몰렸으면 그런 곳까지 찾았겠어요”라고 했다. 지난 9월 한씨는 ‘이자만’ 2년 동안 납부하는 조건으로 모 저축은행에서 1000만원을 대출받아 흩어진 대출금을 하나로 묶었다. 한 달에 30만원씩, 2년간 총 720만원의 이자를 내야 한다.

20대 초반의 청년에게 1000만원의 빚은 무겁기만 하다. “남들이 보기엔 작은 금액일지도 모르지만, 저한테는 건물 한 채나 다름없는 정말 큰 금액이에요. 돈 아끼려고 퇴근길에는 걸어서 집에 오곤 하는데, 한강 건널 때마다 뛰어내릴까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한씨는 이튿날 공장 생산직 면접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 회사만 합격하면 정말 개같이 벌어서 내년 생일 때까지는 빚 갚을 돈을 모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규모는 작아도 부채 느는 정도 청년층 가장 심각”대학 입학과 동시에 청년들은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을 떠안는다. 전국 4년제 대학들의 올해 평균 등록금 636만원. 학교를 마치기까지 학비로만 최소 2500만원가량이 필요하다.

여기에 생활비, 주거비까지 합쳐 수천만원의 빚을 떠안고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중소기업에 취직해 학자금을 상환하고 있는 김지해씨(가명·28·여)는 “급여가 많지도 않은데 학자금 대출이 공제되니 집은 더 좁은 곳으로, 밥도 더 저렴한 것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다”며 “빚이 있다는 건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상태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단계로 빠진 청년들도 있다. 김하용씨(가명·27)는 2013년 돈을 벌기 위해 지인의 소개로 다단계 업체에 들어갔다. 다단계 업체는 건강식품이나 알뜰폰을 팔면서 지인을 데려오도록 하고 성과가 낮으면 대출을 받게 했다. 대출을 쉽게 하는 알선업체를 통해 대출 심사 시나리오를 받았다. 대부업체에서 전화로 대출심사를 하면 대본 읽듯이 줄줄 읽고 대출을 받는 식이다. 네 군데에서 총 1200만원을 빌렸다. 연이율이 35~36%나 되는 고금리였다. 200만원가량의 한 달 급여 중 절반 이상이 이자로 빠져나갔다. 김씨는 “대출을 받고 나서 공황상태에 빠졌다”며 “빚은 있고 돈 값을 능력은 안되고, 걱정만 쌓여서 잠도 설쳤다”고 했다. 다단계를 그만둔 김씨는 아직까지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빚을 갚고 있다. 김덕영 청춘희년운동본부 사무처장은 “지금 청년들은 다른 시대에 비해서 받는 구조적 압력이 크고 그것이 부채문제로 드러나고 있다”며 “빚의 규모로만 따지면 다른 세대보다 적지만 부채가 늘어나는 정도는 청년층이 가장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혜리·김상범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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