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좋니?" 세월호 생존 학생이 들었던 말

신혜연,박희영 입력 2016. 4. 19. 12:49 수정 2016. 4. 2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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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현장] 16일 새벽, 참담한 '답사'를 떠나다

[오마이뉴스 글:박희영, 글:신혜연, 편집:홍현진]

16일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단비뉴스>는 '경향신문 70년, 70인과의 동행'에 참여해 기록학자 김익한과 함께 세월호 참사의 현장을 다녀왔다. 안산 단원고 '416기억교실'과 정부합동분향소를 거쳐 진도체육관, 그리고 팽목항에 이르는 비극의 현장 답사였다.- 기자 말

참사의 시각에 떠난 답사여행

16일, 시청역 3번 출구 앞. 이른 새벽부터 20여 명이 모여 버스를 기다린다. 옷차림으로는 여행객이지만, 표정은 밝지 않다. 엄마와 함께 온 이성준(12)군은 "엄마가 시간이 지나면 세월호가 점점 잊힐 거라 해 기억에 남기려고 답사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답사객을 태운 버스 안에서 '416기억저장소'를 설명하는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 <경향신문>
답사단 버스가 안산으로 출발하자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김 교수는 기록학자이자 사단법인 국가기록연구원 원장이다. 그는 공공기록법과 대통령기록법 제정을 주도했고, 일상과 사회현상을 기록하기 위해 현장을 뛰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진도체육관에서 한 달쯤 유가족들과 함께 지냈고, 안산에 '416 기억저장소'를 만들어 운영중이다.

"오늘은 목소리를 크게 내기도 웃기도 힘든 그런 애매한 날입니다. 안녕하지 않으니 '안녕하세요'라고는 못하고, 만감이 교차하지만 참담함 속의 만남도 반가운 만남이라고 볼 수 있으니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김 교수는 "다른 일반적인 답사여행은 현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일반적인데, 오늘은 버스 이동시간이 대부분"이라며 "오늘 경험하게 될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통해 그동안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여행의 성격을 설명했다.

시각은 오전 7시 즈음. 2년 전 세월호가 군산 앞바다를 지나 진도로 향하던 시간이었다. 답사여행은 시간대마저 참사의 고통과 같이했다.

"세월호 참사와 304명의 희생, 그 기억은 조금 유별납니다. 어찌 보면 직접 상관 없는 건데도 그들의 죽음이 우리 가슴 속에 강렬하게 오랜 기간 남아있습니다. 이번 답사여행은 이처럼 죽음에 직면하며 항상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느끼도록 해 줄 것입니다."

250명 희생자의 영혼이 숨쉬는 416기억교실

오전 8시 30분쯤 버스가 단원고 정문 앞에 도착했다. 답사여행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행정실의 명령이라며 경비원이 답사객의 출입을 막았다. '416기억교실' 설명을 맡은 416기억저장소 김종천 사무국장과 학교 행정실 직원 간에 실랑이 끝에 교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2014년 7월부터 단원고와 경기도교육청이 흔적을 지우려고 시도했다. 정문에 있던 '국민 사랑의 기록'들이 7월에 사라졌다.
ⓒ 신혜연
2학년 1~6반은 3층, 7~10반과 교무실은 2층에 있다. 1~6반은 살아 돌아온 아이들이 있고, 7~10반은 살아 돌아온 아이가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이 미련한 아이들이 나오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1~6반은 배가 기운 쪽에 있었고, 7~10반은 배가 올라가있는 쪽에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이들과 연락된 부모는 대부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안내에 따르라'고 했습니다."

김종천 사무국장은 그 말을 믿었던 아이들은 그 안에서 살기 위해 나가는 순서까지 정했다고 말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기울어질 것이라는 극도의 공포와 긴장감 속에서도 함께 살기 위해 살고 싶은 마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304명을 죽인 '가만히 있으라' 교육

2학년 1반. 19명이 살아 돌아왔고 18명이 희생됐다. 그중 조은화가 아직 바다에 있다. 김종천 사무국장이 1반 생존자 장애진과 아빠의 전화통화 내용을 공개하자 숨죽여 듣고 있던 사람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 번의 전화통화였다. 첫 번째 걸려온 애진의 전화에서 아빠는 상황을 듣고 여느 부모들과 조금 달리 배에서 나오라고 했다. 두 번째 전화는 아빠가 먼저 했다.

아빠: 나왔니?
애진: 아니.
아빠: 왜?
애진: 나가지 말래…
아빠: 왜?
애진: 몰라…
아빠: 나오라니까!
애진: 나가지 말라는데 어떡해…

세 번째 통화할 때는 이미 바닷물이 애진의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아빠는 소리치기 시작했고, 애진은 울기만 했다. 배 안에서는 12번에 걸쳐 연속으로 울리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과 함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움직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지 말자'는 무언의 약속이 무겁게 짓누르는 상황이었다. 울기만 하던 애진이 말했다.

"우리 아빠가 나가래! 우리 아빠가 나가래!"

애진과 옆에 있던 친구들은 탈출해 생명을 건졌다. 바닷물이 온 몸을 삼키기 직전 신속하게 움직인 75명의 학생들만이 우리 곁으로 올 수 있었다. 생존 학생들은 배 안에서 검은 물에 빨려 들어가는 친구, 무서워서 벌벌 떠는 친구, 쓰러진 구조물에 깔려 죽어가는 친구들을 봤다. 그리고 해경이 지나가는 모습도 봤다.

김종천 사무국장은 생존자가 세상의 잔혹함을 겪고 있는 모습이 담긴 한 사건을 소개했다. 참사 1주기 때 한 생존 학생이 추모공원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어떤 어른이 물었다. "살아서 좋니?" 생존 학생들은 진상규명이 되고, 친구들의 죽음이 우리사회에 교훈으로 남을 때 비로소 숨을 쉬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하는 아이들이다.   

 2학년 1반에서 '416기억교실' 이야기를 하는 김종천 사무국장.
ⓒ 신혜연
2학년 2반. 11명이 살아 돌아왔고 25명이 희생됐다. 그중 허다윤이 아직 바다에 있다. 다윤이 엄마는 뇌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딸을 찾지 못한 어미가 무슨 자격이 있냐"며 수술을 거부한 채 피켓을 들고 전국을 헤매고 있다. 이젠 뇌종양이 귀마저 막아버린 상태다.

단원고 희생자 중에는 4명의 미수습자(남현철, 박영인, 조은화, 허다윤), 그리고 두 선생님(고창석, 양승진)이 아직 바다에 있다. 미수습자 유가족의 고통은 헤아리기조차 불가능하다. 유가족 모두 "눈을 뜨면 지옥 같은 하루의 삶"이 시작되지만, 그들도 미수습자 유가족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기간제 교사는 죽어서도 비정규직

2학년 3반. 8명이 살아 돌아왔고, 26명이 별이 됐다. 칠판에 아이들이 선상파티를 즐기는 사진이 붙어있다. 4월 15일은 3반 담임 고 김초원 교사의 생일. 수학여행에 동행했다가 숨진 단원고 교사 12명 중 10명은 순직처리되고, 2명은 제외됐다. 김초원 교사와 7반의 고 이지혜 교사는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순직에서 제외됐다.

 교실마다 칠판 가득 추모글이 적혀있다.
ⓒ 신혜연
2학년 4반. 9명이 살아 돌아왔고 28명이 별이 됐다. 희생된 250명의 형제자매는 240여 명이다. 240명 중 19세 미만은 130여 명. 가장 어린 유가족이 7살이다. 생존자 부모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살아 돌아온 내 아이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이다.

희생자 부모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내 아이의 영혼이 차디찬 세상을 떠돌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다. 미수습자 부모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뼛조각이라도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절박함이다.

그렇다면 남은 형제자매들의 가장 큰 불안요소는 무엇일까?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혼자 운다는 것이다. 김종천 사무국장은 2015년 4월 2일 최윤민의 언니인 최윤아(25)씨와 대화한 내용을 소개했다.

"우리 엄마 아빠 좀 도와주세요. 힘 없는 엄마 아빠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학대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소리지르면 '유가족 갑질 한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울고 있으면 '이제 그만하라'고 합니다. 저 또한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마저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고 노지성 학생의 엄마는 먹는 약이 한 알 두 알 늘어 한 움큼을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지성의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엄마, 진짜 열심히 했는데, 이제 그만하면 안 돼? 살아야 되잖아. 우리도 살자."

함께 고통스러운데, 더 고통스러운 부모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형제들. 김 사무국장은 "부모마저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자기를 숨기게 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어린 아이들은 유아적 특징이 사라졌고, 청소년들도 반항 한번 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부모의 모습 앞에서 형제자매는 감정을 잃었다.

 단원고 ‘416기억교실’에는 250명 자리가 모두 보존돼있다.
ⓒ 신혜연


"왜 유난 떠냐"고 다그치는 사회

2학년 5반. 9명이 살아 돌아왔고 27명이 별이 됐다. 1주기가 지난 2015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한 중학교에는 11명의 유가족 형제자매가 있다. 한 아이가 조용히 교실 밖으로 나가 교감을 만났다. 교감이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들은 다 괜찮은데, 왜 너만 유난을 떠니?"

한 교사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위한 방이 마련됐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 점심 시간에 모여 서로 슬픔을 보듬는다. 그들은 2년간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지 못하고 컵라면과 과자 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나마 이 중학교는 형제자매를 위한 교사들의 배려가 있다. 그러나 다른 유가족 학교에는 그조차도 없다. 김 사무국장은 "아이들이 숨을 쉴 수 없다고 한다"며 "유가족 형제자매들은 대체로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김 사무국장은 지난해 6월 고 박성호 학생의 누나 예나가 겪은 일을 전해줬다.

"국장님 점점 힘들어져요. 친구들하고도 매일 싸워요. 친구들이 저보고 그래요. 그만 유난 떨라고. 어떤 친구는 그랬어요. '그만큼 했으면 됐잖아, 나도 많이 이해해줬거든.'"

희생자들의 형제자매는 이제는 싸울 수 있는 친구조차 남아있지 않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직장과 군대까지. 상황은 거의 다르지 않다. 사회는 그들을 외톨이로 만들어갔다.

 416기억교실에서 답사객들이 김종천 사무국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 신혜연
흔적을 지우려는 자들

2학년 6반. 13명이 살아 돌아오고, 25명이 희생됐다. 남현철과 박영인은 아직 바다에 있다.

그동안 단원고는 희생자 아이들이 사용하던 교실존치 문제로 내홍을 겪었다. 김 사무국장은 "최근 뉴스를 보면, 유가족이 양보해야 한다는데 왜 늘 피해자에게 이 사회는 양보를 받아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416기억저장소와 유가족이 2015년 9월부터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피켓을 든 이유는 5가지다. 첫 번째는 '사회적 기억'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서다. 단원고 416기억교실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사회적 기억이 구체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공간이다. 희생자 304명 중 250명의 단원고 학생과 12명 교사들의 빈 자리를 눈앞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4월 16일 이후 지옥을 살아가는 유가족들의 삶을 말해주는 곳이 이 교실이다.

두 번째는 세월호 참사가 아직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김 사무국장은 "그 어떤 사회적 결론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기록을 치우고 그 기억을 지우는 게 가능한가"라고 되묻는다.

세 번째는 인간에 대한 도리다. 아직 바다 속에 있는 네 아이와 두 선생님을 기다리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다.

네 번째, 교육의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아이들이 왜 죽었나? 한 시간 동안 12번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했다. 아이들은 그 방송을 믿고, 선생님을 믿고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은 아무도 상황판단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선원을 찾아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김 사무국장은 교육의 핵심목표는 생존이라고 말한다.

"나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 나의 친구들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 나는 어떻게 하지? 나의 인권이 짓밟힐 때, 나의 친구들 인권이 짓밟힐 때는 어떻게 하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목표가 대학에 가는 것입니까? 어떻게 대학교육의 목표가 직장에 취직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아닙니까?"

다섯 번째, 민주주의를 위해서다. 김 사무국장은 "민주주의는 그 사회의 다수가 가장 고통받는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416기억교실은 유가족에게 뼈아픈 그리움을 만나는 장소다. 이 교실을 치운다는 건 그 그리움마저 빼앗아가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회가 가족들에게 '통 큰 결단'을 요구하더라도 유가족들은 "교실의 의미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사회가 생각해달라"고 말한다.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 그들이 상당한 양보를 했는데도 협약식은 진행되지 못했다. 협약 당사자 중 일부가 오지 않았다. 사회적 협약은 학교 앞 도로에 '416민주시민교육원'을 짓고 교실을 이전한다는 내용이다.

2학년 7반, 1명 생존에 32명 희생. 8반, 2명 생존에 29명 희생. 9반, 2명 생존에 20명 희생. 10반 1명 생존에 20명 희생. 희생된 250명 학생과 12명 교사, 42명 일반인. 그들은 함께 살기 위해 배 안에서 침착하게 배 밖의 메시지를 기다렸다. 동시대를 살던 우리는 304명의 삶과 꿈이 사라지는 모습을 TV 생중계로 지켜본 목격자다. 목격자는 방관자가 되지 않기 위해 증언하고 기억해야 한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나면 닥칠 '기억 지우기'

답사단은 416기억교실을 떠나 정부합동분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416세월호가족협의회 집행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단원고 2학년 3번 24번 예은 아빠 유경근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시험받고 있는 것 같다"면서도 "지난 2년간 많은 분들이 함께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주셔서 조금 더 힘을 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 1주기 때는 해외에서 추모식이나 추모문화제 등이 22개 도시에서 진행됐는데 올해는 집계된 행사만 31개 도시에서 열린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로 각지에서 자발적인 추모 행사가 이뤄졌다. 주목할 점은 십대, 이십대 청소년들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청년들의 참여에서 희망을 봤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텐데, 문제는 언제냐는 것입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데, 그럴수록 젊은 사람들이 함께 해주는 게 더 힘이 됩니다. 언젠가 드러날 진실, 그 앞에서 함께 증인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 함께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면 저희는 충분합니다."

진실이 밝혀졌는데 정작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진실의 의미는 묻힌다. 그것을 간과하면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가 준 뼈아픈 교훈을 얻지 못한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2주기가 지나고 나면 여러 측면에서 세월호 참사를 지우기 위한 일들이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배가 인양되면 모든 게 끝났다고 몰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는 2주기가 추모일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함께 돌파하고 이겨나갈 수 있는 독려와 다짐의 자리가 되길 희망했다.

 안산 정부합동분향소에서 답사객을 맞은 416세월호가족협의회 유경근 집행위원장.
ⓒ 신혜연
책임질 사람이 잘나가는 사회

안산분향소를 떠나 진도체육관으로 향하는 버스에서는 다시 김익한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유가족들이 잘 살아야 내가 이 사건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유가족들이 아니라 세월호 사건의 책임자들이 얼굴 번드르르하게 잘 사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대표적 인물이 이주영 전 해수부장관이다. 수염도 깎지 않은 채 팽목항을 지키던 그는 유족들과 한 약속은 하나도 지키지 않고 떠났다.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수많은 국회의원과 공무원이 진도를 찾았지만 유가족들에게 도움 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진도체육관에서 공무원들이 한 일은 의전과 보고뿐이었다. 자원봉사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자원봉사자들은 한없이 대기해야 했다. 2박3일을 대기만 하다 간 사람도 있었다.

체육관 양옆에는 각 정부 부처에서 세운 부스들이 빼곡했지만 유일하게 작동하던 부스는 응급약을 제공해주는 부스 단 한 곳뿐이었다. 밥차를 운영하던 자원봉사자가 귀가 길에 과로로 쓰러져도 보건복지부 부스에서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대통령 방문 이후 대형 TV가 설치됐지만, 유족들은 "대통령이 설치한 대형TV를 통해 대통령이 하는 거짓말만 봤다"고 한탄했다.

2년 뒤 다시 찾은 체육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불 꺼진 체육관 어느 곳을 돌아봐도 유가족들이 밤새워 아이들을 찾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앞으로 진도체육관은 관광객 개방이 금지된다. 팽목항도 재개발이 계획돼 있다. 이제 기억하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숙제가 됐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은 노란 띠와 펼침막이 세찬 바닷바람에 펄럭인다.
ⓒ 박희영
여전히 애타는 '기다림의 공간' 팽목항

이어서 분향소가 있는 팽목항으로 향했다. "진도체육관에서 팽목항이 얼마나 먼가를 느껴보라"고 김 교수가 주문했다. 유족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체육관과 팽목항을 오갔다. 아이들과 가장 가까운 장소인 팽목항 등대에 머물다가, 정부의 브리핑을 듣기 위해 진도체육관으로 옮겨갔다. 마음은 급한데 길은 멀기만 해 엄지발가락을 펴지 못할 만큼 긴장한 채로 이 길을 오갔다고 한다.

2년 전 이날, "국가는 팽목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고 김 교수가 말했다. 진도체육관보다 더 무질서한, 아수라장 같은 상황이었다. 팽목항 분향소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작년 1월 유가족들과 시민사회가 함께 만든 공간이다. 내부로 들어서자 영정사진이 빼곡했다.

'세월호 속에 아직 현철이가 있습니다!', '인양이 세월호의 열쇠입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이들은 사진 대신 가족들이 남긴 메시지가 자리를 지켰다. 노란 종이 위에 쓰인 절절한 글귀가 분향 온 이들의 마음을 때렸다. 분향을 위한 진혼곡이 흐르고, 때마침 내린 비에 흠뻑 젖은 방문객들이  눈물을 함께 떨구며 거기 서있었다.

2주기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팽목항을 찾았다. 부산에서 온 조형기(31)씨는 "한번쯤은 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 실천했다"고 말했다. 팽목항 분향소는 그날의 사건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장소다.

유가족들이 머물던 팽목항 등대로 향했다. 서있기도 힘들 만큼 거센 바람이 방문객을 맞았다. 뒤늦게 찾아온 이들을 원망하듯 성난 파도가 그르렁거렸다. 난간에는 아이들을 추모하는 현수막이 연이어 걸렸다. '축구를 좋아하는 영인이'의 그림 속 얼굴도 비를 맞고 있었는데 눈물을 훔쳐내려는 듯 현수막이 펄럭거렸다.

등대는 실종자 가족의 통곡의 장소였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기억의 의자' 위로 바다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을 유가족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사고지역은 등대로부터 일직선으로 배를 타고 1시간 이상 가야 하는 먼 거리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거리지만 그나마 지상에서 자식과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부모들의 마음이 머물러 있었다.

  아이들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쳐다봤을 팽목항 앞바다.
ⓒ 박희영
공동체 정신은 기억에서 나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 교수는 '416정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족들은 세월호 참사 100일 째 되던 날 안산에서 서울시청광장까지 1박2일 도보행진에 나섰다. 대규모 집회에 참여해 본 경험이 거의 없던 유족들은 그날 광장에서 자신들을 맞으러 나온 일만여 명 시민들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타인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공동체 정신, 곧 사회적 삶의 시작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업의 횡포를 두고 봤기 때문에 내 아이가 희생된 게 아니냐는 유족들의 후회 역시 사회적 삶의 결핍에서 온 것으로 해석된다.

"유가족들은 지금 국가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느끼지만, 그런 국가를 만든 건 자신입니다. 그걸 아이를 잃고서 느끼게 된 거죠. 저도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사회적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늘 말하고 다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과는 강도가 다르죠. 그분들은 정말 절절했습니다. 사회적 실천에 눈감고 산 것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계신 겁니다. 그 후회 때문에, 지금은 개인적 삶을 너무 제쳐놓고 사시는 것 같아서 제가 우려할 정도입니다. 거대기업과 국가를 포함한 사회적 관계에 늘 대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게, 유가족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역사가이기도 한 김 교수의 눈에 세월호 참사는 '변화의 계기'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각자에게 실천의 과제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에게 자기혁신을 요구한다. 그가 유가족들을 찾아 아픔을 같이하고, 이야기라도 들어주는 시간을 1년에 한 번이라도 만들 것을 추천하는 이유다.

아도르노는 사람들이 주관적인 '도덕률'을 기준으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행위를 '시민적 가벼움'이라며 경계했다. 김 교수는 1년에 한 번뿐이라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해 보는 경험이 '시민적 가벼움'을 극복할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이계춘(46)씨는 세월호 사건과 광주에 대한 기억을 연관시켰다.

"세월호 현장을 둘러보면서 518광주민주화항쟁이 떠올랐습니다. 영원히 묻힐 것만 같던 이 사건도 결국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 왔잖아요. 세월호는 광주보다도 해결이 더 빨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공동체 정신은 결국 기록과 기억에서 나온다. 세월호를 기억할 것이냐, 잊을 것이냐, 한국 사회는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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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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