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불난 건물 들어가서 "나오세요!"..'의인' 끝내 숨져

화강윤 기자 입력 2016. 9. 22. 08:2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살신성인' 28살 안치범 씨 영면

관련 8뉴스 리포트
불길 속 잠든 이웃 깨우고 …끝내 숨 거둔 '의인 (9. 20.)'

추석을 앞둔 지난 9월 9일 새벽 4시 20분쯤,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5층짜리 다세대 주택 3층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 불로 20대 남성 1명이 중태에 빠진 것을 비롯해 2명이 다치고 5명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중태에 빠진 28살 안치범 씨는 이 건물 4층 주민이었습니다. 그는 맨 처음 화재를 신고한 사람이었습니다. 현관 CCTV에는 안 씨가 가장 먼저 대피해 1층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건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찍혀있었습니다. 

연기와 열기가 가득 찬 건물 안으로 뛰어든 안 씨는 결국 5층 계단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습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안 씨는 20일 새벽 1시 50분, 끝내 숨졌습니다. 향년 28세.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정혜경 씨는,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에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했다. 아들 잘했다."

● 불 지른 20대, 불에 뛰어든 20대

화재는 3층의 한 방에서 누군가가 불을 놓아 시작됐습니다. 경찰은 중국 동포인 20대 남성 김 모 씨를 방화 혐의로 붙잡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 방에서 함께 살던 연인이 결별을 요구한 것이 동기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김 씨는 범행을 부인하고 있지만, 경찰은 김 씨의 방화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해 김 씨를 구속하고 검찰에 넘겼습니다.  

당시 상대 여성은 집에 없었지만, 홧김에 시작된 불은 주변으로 번지고 연기를 내뿜으며 20여 가구가 사는 건물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대부분 잠들어 있었을 새벽 4시, 큰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최초 신고자인 안 씨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큰 인명피해가 없었습니다. 

● "나오세요!" 사람들 구해낸 외침 

가장 먼저 몸을 피했던 안 씨는 왜 다시 건물에 들어갔을까요? 맨 처음 위험을 알린 사람을 본 사람은 없지만, 경찰은 안치범 씨가 불이 난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간 것이 구조를 위해서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주민들을 상대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입을 모아 어떤 남자가 돌아다니며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면서 다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층에 사는 심 모 씨는 깊은 새벽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며 "나오세요!"라는 외침을 듣고 화재를 알게 됐습니다. 불이 시작된 방 맞은편에 살던 20대 여학생도 복도에서 3차례나 "나오세요!"라고 외치는 남성의 목소리를 듣고 연기를 확인한 뒤 밖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4층 주민 오정환 씨는 당시 잠들어 있다가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 불이 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주민들은 미리 대피하거나 화장실 같은 곳으로 피해 있다가 소방관들에게 구조됐습니다. 오정환 씨는 "다른 분 중에서 초인종을 눌렀다는 분이 없고, 제일 먼저 대피해서 119에 전화했는데 5층에 쓰러져 계셨다고 하는 거 보니까 (안치범 씨가) 다시 올라오셔서 초인종 하나하나 누르시다가 쓰러지신 거 같아요. 아마 그때 초인종 눌러주시지 않았으면 저는 계속 잠들어있었을 거고 그분 덕에 일어나서 대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현장에 출동했던 소방관은 안 씨가 몸에 지닌 것도 없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며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정작 자신은 연기를 많이 마셔 쓰러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 연기에 스러진 성우의 꿈

유가족의 양해를 얻어 방에 들어가 봤습니다. 88년생, 20대의 마지막을 지나는 취업준비생 안치범 씨의 방은 평범했습니다. 한쪽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 게임 CD들, 우유에 말아 먹던 시리얼과 조금은 어질러진 옷가지들. 다른 누구의 생활 터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취업의 문이 좁은 성우를 지망했던 안 씨. 그가 진로를 고민하고, 연습하고, 놀고, 좌절하고, 희망하고, 꿈을 키웠을 좁은 방은 별다른 그을음도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안치범 씨의 방에는 바깥으로 연결된 베란다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피하지 않았어도, 방에 있다가 베란다에만 나갔어도 변을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화재 소식을 처음 접한 안치범 씨의 가족들은 신고자가 안 씨라는 얘기를 듣고, 안 씨가 무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 난 우리 아들 그렇게 안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신고도 하고. 걔가 그렇게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정혜경/안치범 씨 어머니]

부모님들은 안치범 씨 생전에 TV를 보다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습니다. 

"치범아 저런 위급한 상황에는 꼭 네 목숨을 살려야지, 남의 목숨 살리다가 네 목숨 살리면 절대 안 돼라고 내가 그랬더니, 화를 내면서 나보고 '도와주면서 살아야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정혜경/안치범 씨 어머니]

그날의 열기는 가셨지만, 연기는 지금도 꽤 남아있었습니다. 촬영을 위해 잠시 돌아다닌 것만으로 한동안 가슴이 답답하고 기침이 나서 괴로웠습니다. 사고 10일이 지났는데도 그런데, 화염이 일렁거리던 그땐 얼마나 더 괴로웠을까요. 안 씨는 기다리던 입사 시험의 원서 접수 마감 일에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경찰이) 그 밑에 내려왔던 마지막 사진 보여줬어요.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내려가는데 지는 올라간 거에요."[정혜경/안치범 씨 어머니]

●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

영화 <밀정>에서 극 중 정채산은 말합니다. "난 사람들 말은 물론이고 내 말도 믿지를 못하겠소. 다만,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항상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유가족들은 의롭게 떠난 치범 씨의 뜻을 기리고 싶다며 마포구청과 협의해 의사자 신청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SBS는 유가족의 뜻을 좇아 <나도펀딩(아래 링크)>을 통해 모은 기부금을 안치범 씨의 이름으로 기부할 계획입니다. 

故 안치범 씨의 명복을 빌며, 어머니 정혜경 씨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다는 말을 하늘에 대신 전합니다.

"치범아 사랑해. 엄마가 진짜 사랑해. 내 아들."

▶ 불길 속 이웃 구하고 숨진 의인…안치범 씨 후원하러 가기    

화강윤 기자hwaky@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