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있으나 마나 안전 지침..'하인리히 법칙'이 주는 교훈

박하정 기자 2016. 10. 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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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00’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1930년대 미국의 한 보험회사 직원인 하인리히가 쓴 책에 등장하는 법칙이다. 많은 사고 사례를 접하고 통계를 내던 그는, 대형사고 1건, 혹은 중상자 1명이 발생하기 전에 그 전조가 되는 징후가 분명 존재했었다는 어떤 ‘법칙’ 발견에 이른다. 1:29:300이 바로 그 비율이다. 산업재해가 발생해서 중상자가 1명 나오면, 그 이전에 경미하게 다친 사람이 29명 있었고, 같은 이유로 다칠 ‘뻔’했던 사람도 3백 명 있었다는 법칙이다. 대형 사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형사고 1건이 터지기 전에 경미한 사고 29건이 있었고, 이전에 그 사고를 암시할 징후가 3백 건 있었다는 의미다.

물론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대형사고의 전조 증상인지 단순한 일회성 사건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숱한 안전 지침들이 마련된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점검하고 또 점검하라는 취지다. 이런 지침들이 잘 작동한다면 3백 건의 징후와 29건의 경미한 증상이 사전에 포착될 수 있고, 단 1건의 대형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수력원자력 산하의 원자력발전소에 대해 원자력통제기술원이 실시한 보안 점검, 국민안전처가 전국 주요 시설물에 설치한 지진계측시스템 역시 그런 장치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이 장치는 있으나마나였다. 이곳에서 하인리히 법칙은 아무 교훈도 주지 못했다. 

● 2주 동안 8천 번 넘게 들어온 원전 경고등

원자력안전위원회 산하 원자력통제기술원은 한국수력원자력 산하 전국 원자력발전소를 대상으로 정기 점검을 실시한다. 발전소별로 2년에 한 번씩 2주 동안 실시하는 이 점검은 ‘원자력시설 등의 방호 및 방사능 방재 대책법’에 의거해 이뤄진다. 원전이 가장 높은 보안 등급이 요구되는 시설인만큼 철저한 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검사 결과를 토대로 원자력통제기술원은 각 시설에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 불법이전 등 방호요건을 위반했을 때, 물리적 방호 및 운영체제가 미흡하거나 규정을 위반했을 때, 방호 비상계획 조치가 미흡할 때 등 이미 설정돼 있는 규정을 위반하거나 사전 조치가 기준에 달하지 못했을 때 등 크게 두 가지 경우에 해당되면 시정명령을 받는다.

올해 원자력통제기술원은 신고리 제2발전소, 한울 제1,2,3발전소, 한빛 제3발전소를 점검했고 다른 곳도 계속 점검하고 있다. 점검 결과 9월 6일 기준으로 26건의 위반 사례가 확인됐다. 시설·설비 운영체제가 미흡한 건이 모두 11건, 방호 규정과 요건을 위반한 건이 15건이었다. 갖춰졌어야 할 체제가 미흡하고, 지켰어야 할 규정을 위반했다는 점에서 원전사업자들의 안전 불감증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한울원자력본부 제1발전소에서는 검사가 이뤄졌던 2주 동안 경고등에 불이 8천 번 넘게 들어왔다. 보안 강화를 위해 발전소 내 출입문들은 5초 안에 닫히도록 돼 있는데 이 문이 열려 있을 때 들어오는 경고등이었다. 경고등이 켜지면 보안 담당 직원들이 경고등이 들어온 현장에 직접 가보거나 상황을 확인한 뒤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 발전소에서 경고등이 들어왔던 문은 모두 115개였다. 또 그 구역 출입 허가증을 지니고 있지 않은 협력업체 직원이 발전소 핵심구역에서 혼자 있다 적발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특정 구역에 들어갈 권한이 없는 출입증을 대며 누군가가 문을 열려고 시도한 건, 본부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서 차량 번호판을 인식하는 기기의 인식률이 낮아 차량번호 확보가 안돼 이 인식률을 높이라는 지적 등이 쏟아졌다.

● 점검 기간 단축시키는 게 곧 돈입니다

기자가 현장을 찾았던 한국수력원자력 한울원전본부는 모두 15건의 시정명령 조치를 받았는데, 우선 시정명령을 건별로 이행하고 그 결과를 제출하고 있으며, 프로세스 개선을 위한 지침이나 절차서 개정, 물리적 방호 설비에 대한 일부 보강, 개선된 내용에 대한 경비 인력 등 직원 교육 수행 등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보안 점검을 받을 당시가 계획 예방 정비 기간이라는 특수한 시기였기 때문에 위반 사례가 많이 발생했다고도 해명했다. 계획 예방 정비란, 원전을 일정 기간 동안 운전하고 난 뒤 핵연료를 교체하기 위해 발전소를 정지시키고 원자로나 터빈 등 각종 기기를 점검, 교체, 보수하는 것을 말한다. 2개월이 넘도록 이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번 원자력통제기술원의 보안 점검 시기가 이 계획 예방 정비 시기와 겹쳤다는 것이다. 이 기간에는 집중적인 점검과 수리가 이뤄지기 때문에, 원래 한울본부 담당인 (출입증을 지닌) 협력업체 직원 외에 다른 본부를 출입하던 (출입증이 없는) 업체 직원들도 불러 함께 일을 하게 된다는 게 한울본부 측의 설명이었다. 즉, 가만히 놓아두면 여닫이문이 자동으로 닫히지만, 그 기간에는 장비를 자주 들고 오가기도 하고 드나드는 사람 자체가 많은 만큼 문이 오래 열려 있게 돼 경고등이 울릴 일도 많다는 것이다. 계획 예방 정비 기간이 아닌 시기에 이 경고등이 들어오는 횟수는 계획 예방 정비 기간보다 80% 이상 낮다는 설명도 함께였다. 또 발전소 핵심구역에 혼자 있다 적발된 협력업체 직원의 경우에도 원래 다른 본부 협력업체 직원이지만 계획 예방 정비 기간이라 인력이 많이 필요해 들어오게 된 직원이고, 애초부터 혼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출입증, 즉 출입권한을 가진 직원과 동행했다가 그 직원이 또 다른 일을 보기 위해 잠깐 자리를 떠서 혼자 있다 적발됐다고 한울본부는 설명했다. 해당 기간에 집중적으로 점검을 해야 하고, 이 기간을 단축시키는 게 곧 돈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설명도 뒤를 이었다.

● 계측은 해놓고 활용은 정작 못해

지난 9월 12일 규모 5.8의 경주 지진 이후 여론의 뭇매를 가장 많이 맞은 곳은 국민안전처였다. 긴급재난문자 전송 등, 지진 발생 뒤 그 대처가 주무 기관으로서 적절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비판은 국민안전처의 대처에 집중됐는데, 계측에서부터 문제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국민안전처는 기상청과 별도로 전국 주요 시설물 580개에 설치된 지진가속도계측기에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한다. 공공기관 청사, 공항, 교량, 원전, 댐 등이 그렇게 계측기가 설치돼야 하는 주요 시설물에 해당한다. 이곳에 설치된 계측기에서는 시설물이 얼마나 힘을 받았는지를 측정한다. 시설물에 가해진 힘이 어느 정도이고, 그래서 이 시설물에 대한 안전점검이 필요한지,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돼야 하는 건 아닌지 등 위험도를 분석해 안전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번 경주 지진 당시 계측기 580대 가운데 124대에서 측정한 데이터가 국민안전처로 보내지지 않았다. 측정은 해 놓고도 그 측정값을 가지고 위험도를 분석하지 못하게 된 건데, 계측기 4대 가운데 1대 꼴로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또 교량이나 댐 등을 제외하고 건축물만 대상으로 별도로 이뤄지는 긴급 안정성 평가 결과는 설치 대상 337개 건축물에 있는 계측기들 가운데 103개만이 그 결과를 국민안전처로 보냈다. 제대로 전송이 된 게 계측기 전체 가운데 30.5%에 불과했다.

국민안전처의 지진가속도 계측자료 통합관리시스템이 먹통이 된 탓이었다. 국민안전처는 당시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며 보수 작업을 벌이고 있고, 당시 데이터는 측정이 아예 안됐던 게 아니기 때문에 추후 따로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계측기의 측정값을 국민안전처로 전송하고 그 전송된 값의 결과에 따라 선제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이 시스템의 본래 취지는 이미 상당 부분 훼손된 듯하다. 국민안전처는 이 계측기의 설치 대상이 되는 시설물들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계측기 2백 여 대를 전국에 추가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계측기 1대 가격은 약 1억 3천만 원에서 2억 원. 무작정 계측기를 늘리는 것보다 이미 설치된 계측기를 철저히 점검하고 잘 활용하는 게 급선무라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 계속되는 안전 불감증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아도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태풍이나 지진 등 자연재해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충분히 대비하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안전 불감증으로 놓치는 관계 당국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계획 예방 정비 기간이라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다는 해명에 대해, 평소 오지 않던 사람들까지 드나드는 상황이었다면 더 철저히 보안 단속을 했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멀쩡히 측정해놓은 데이터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방치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미리 시스템 과부하나 오류가 일어나지 않게 점검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작은 보안 구멍이라도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안전 불감증을 경계하는 것이고 이를 막을 수 있는 각종 지침들이 마련된 것이다. ‘우연이겠지’, ‘괜찮겠지’가 쌓여 ‘만에 하나’가 된다. 하인리히 법칙이 주는 교훈을 관계 당국이 되새겨볼 때다.   

박하정 기자parkhj@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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