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최태민, 육 여사 빙의.. 朴, 그 모습에 놀라 기절했다"

서산=유영대·박재찬 기자 2016. 10. 3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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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최측근 전기영 목사 일문일답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 총회장 전기영 목사가 27일 오후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총회본부에서 국민일보 취재진을 만나 최태민씨의 생전 활동에 대해 밝히고 있다. 서산=유영대 기자
최태민씨(오른쪽 세 번째)와 영애 시절 박근혜 대통령이 1975년 6월 21일 서울 서대문구 배재고 운동장에서 열린 구국십자군 창군식에 참석해 단상 위에 나란히 서 있다. 대한뉴스 동영상 캡처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 현판.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종합총회 총회장 전기영 목사는 영세교 교주 최태민씨에 대해 "주술가이고 무당"이라고 평했다.
전 목사는 5시간여 인터뷰를 하는 동안 목회자로서 진지하고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연로함에서 오는 말의 끊김과 반복 등을 드러내기도 했다.
전 목사는 "차라리 이번 일이 잘 터진 것 같다. 청와대에서 주술의 힘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교회를 향해 "이 나라가 안정되고 국민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거듭 주문했다. 다음은 전 목사와의 일문일답.

-당시 최태민의 위세가 대단했다던데.

“최씨는 칼잡이 6명을 데리고 다녔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것 같았다. 박근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이하 존칭 생략)와 함께 서울 강남에 나타나곤 했다. 최씨는 1993년 10월 종합총회 교단에서 쫓겨나 94년 1월에 죽었다. 한데 94년 5월에 죽었다고 발표됐다. 의문이다. 많은 목사들이 최씨에게 붙지 못해 안달을 했다. 왜냐하면 최씨가 돈을 물 쓰듯 썼기 때문이다.”

-최태민이 박근혜를 알게 된 동기는.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다. 그 무렵 박근혜에게 최씨가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죽은 육영수가 나타나 ‘내 딸 근혜가 우매하니 당신이 그녀를 도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박근혜가 최씨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까만 승용차들이 최씨가 도를 닦는 곳에 왔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엄청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박근혜 앞에서 최씨가 육영수의 영혼에 빙의됐다면서 그녀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연했다. 이것을 보고 놀란 박근혜가 기절하고 입신(入神)을 했다.”

-입신이라면….

“입신이란 말은 최씨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입신은 교계 용어다. 예컨대 환상을 본다거나, 천국이나 지옥을 본다든가, 뜨거운 성령 체험, 신들렸다는 등. 놀란 박근혜가 그때부터 최씨를 신령스러운 존재로 보게 됐다고 한다.

최씨는 박근혜가 대통령에 나올 것인데, (자신이 관리하는 자금이) 서울 안국동 조흥은행에 13억원, 그리고 이자 9000만원이 있으니 그것으로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최씨가 하나님은 언급하지 않고 ‘우리 신’이라는 표현을 써 이상함을 느꼈다. 목회자인 내가 보기에 그건 성령의 은사가 아니고, 귀신의 역사였다.”

-박근혜가 최순실을 의지했는가.

“맞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최태민의 주술의 영을 그대로 딸 최순실과 사위 정윤회가 이어받았다. 선무당이 국가를 잡은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이들의 주술에 홀렸다. 주술을 모르면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한때 최태민·박근혜 연인설이 돌았는데.

“물은 적이 있다. 최씨가 ‘내가 나이가 있는데…’라고 반문하더라. 나이도 많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인 것 같았다. 다만 ‘박근혜와 나는 영의 세계 부부이지, 육신의 부부는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추문이 끊이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조사를 지시해 직접 이른바 ‘친국’(예전에 임금이 직접 중죄를 지은 자에게 일일이 따져 묻는 일을 이르던 말)을 했다. 그럼에도 박근혜는 끝까지 최태민을 변호했다. 이후 재판에서 김재규는 대통령 시해이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을 처벌하지 않은 실망감을 들었다.”

-최씨를 언제부터 알았나.

“1979년이다. 예장 종합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을 때 만났다. 곧바로 부총회장에 임명됐다. 당시 최씨가 총회장이었는데 총회장이 부총회장을 임명하는 구조였다. 이후 간헐적으로 만나다 80년대 후반부터 많이 만났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만난 적도 있다. 최씨가 나를 좋아했다. 최씨는 많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94년 사망 직전까지 대화를 많이 나눴다.”

-최씨는 목사가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최씨는 1975년 우리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하지만 신학교육은 받지 않았다. 당시 돈 몇 푼 주고 목사안수를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최씨도 그런 인물 중 하나다. 당시에는 목사 안수를 쉽게 주던 때였다. 기도원 갔다 온 사람들에게도 30만원, 50만원에 줄 정도였다.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당시 최씨도 돈을 주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교단 설립자 목사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최씨와 결별하고, 내가 총회장을 맡은 뒤부터는 그렇지 않다.”

-최씨가 신학을 하지 않았다고 했나.

“그렇다. 한번은 예배 때 축도를 못해 옆에 있는 목사가 축도 문구를 적어주었다. 최씨가 ‘축도’라고 크게 외치는 모습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하지만 최씨의 말을 듣다 보면 종교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다. 천주교 얘기도 많이 했고…. 특히 글을 잘 쓰고 붓글씨를 잘 썼던 기억이 난다.”

-최씨는 교단에서 스스로 나갔는가.

“쫓겨났다. 최씨는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을 주면서 지금 최순실이나 정윤회가 하는(박근혜 대통령을 돕는) 일을 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최씨는 병을 고치고 점을 치는 등 주술적인 내용이 많았다. 특히 기독교 신학에서 벗어나는 짓을 계속해 교단에서 쫓겨난 것이다.”

-최태민이 교단에서 활동할 당시 특별한 기억나는 것은.

“최씨는 유난히 흰색을 선호했다. 성경과 찬송 겉표지까지 흰색 표지로 싸서 들고 다녔다. 교단 목사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면 반말과 욕설이 거침없었다. 내가 부총회장이 됐을 때다. 최씨는 ‘이 ×끼들아. 너희는 무당이 가지고 있는 혼도 없는 것들이 무슨 목사라고 하느냐. 나보다 영이 높아서 부총회장 시켰어. 야 이 ×끼들아 똑바로 들어라’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어쨌든 최씨와 함께하셨다.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하면 나뿐 아니라 우리 기독교 원로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최태민 같은 사람이 생긴 것이라고 본다. 나부터 회개기도를 드린다. 입이 백 개라도 말 못할 사람이 교계에 참 많다.”

-최씨의 교계 활동을 증언해 달라.

“최씨는 영(靈)이 다른 사람이다. 산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었다. 목사가 되고 서울 강남에 ‘만남의교회’라는 200평쯤(660㎡) 되는 교회를 세웠다. 신학교도 설립했다. 그의 딸 최순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몬테소리 유치원 큰 것을 차렸다. 나를 끌어들이려 했지만 귀신들린 이야기를 하도 많이 해 거절했다. 하나님이 아닌 신을 찾고 주술적인 말을 하도 많이 하길래 ‘이놈아, 네 정체가 무엇이냐. 누구 앞에서 재주를 부려’라고 소리쳤더니 얼굴이 찌그러지면서 저리 도망가더라.”

서산=유영대·박재찬 기자 ydyoo@kmib.co.kr, 사진=유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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