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테러방지법' 14년..시민은 '용의자'가 됐다

이인숙 기자 2016. 2. 29.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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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부시 정부의 ‘애국자법’ 9·11 테러 5주 만에 통과
ㆍ정황만으로 용의자 양산 개인정보 무차별 수집도
ㆍ논란 끝 지난해에야 폐기

9·11테러가 일어난 지 2년 반 가까이 지난 2004년 5월, 미국 뉴욕주의 버펄로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스티브 커츠 교수는 부인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지자 응급신고전화인 911에 연락을 했다. 그의 집으로 구급대원과 경찰이 찾아왔다.

바이오 아트(생물학 소재를 이용한 예술)를 하는 커츠의 집은 생물학 실험실을 방불케 했다. 그는 유전자변형(GM)식품에 관한 작품을 준비 중이었다.

다음날 연방수사국(FBI) 테러합동대응팀, 국토안보부 관계자들이 커츠의 집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커츠의 집 주변에 폴리스 라인을 치고 그의 책과 메모지, 컴퓨터를 이 잡듯 뒤졌다. 커츠는 22시간 동안 영장도 없이 구금됐다. 공중보건이나 안전에 위해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는 일주일 뒤에야 자기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생화학 테러 혐의를 벗었음에도 그는 기소됐다. 비병원성 세균을 온라인으로 주문·결제했다는 죄였다. 이 일을 도운 동료교수도 기소됐다. ‘죄가 안된다’는 법원의 판단은 2008년에야 나왔다.

2002년 11월 멕시코에서 하와이행 유람선에 탔던 스무 살 여성 켈리 퍼거슨은 배 안 화장실에 “미국으로 기수를 돌리지 않으면 승객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쪽지 2장을 붙였다. 갑자기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자 남자친구에게 빨리 돌아가기 위해 배를 회항시키려고 벌인 소동이었다. FBI가 급파됐고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졌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소동을 벌인 퍼거슨이 치러야 할 대가는 혹독했다.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부모 집에서 전자발찌를 찬 채 출산한 뒤 교도소에 갇혔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은 9·11테러가 일어나고 5주 만에 통과된 ‘애국자법(Patriot Act)’ 때문이었다. 조지 W 부시 정부가 통과시킨 ‘미국판 테러방지법’인 애국자법은 테러 증거가 없어도 징역형을 선고하거나 정황만으로 테러 용의자로 기소할 수 있게 했다. 법원의 영장 없이도 FBI가 ‘국가안보레터’만 보내면 통신기록과 거래내역을 볼 수 있었다. 대상을 명시하거나 근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었다. 수사·정보당국은 마약밀매범, 살인범, 위조여권으로 도망친 수배자를 찾는 데에도 이 법을 들이댔다. 9·11 이후 법무부가 조사한 테러 사건 수가 급증했으나, 기소된 사건의 75%는 문서위조 같은 범죄들이었다. 수사당국은 2012년 마약밀매 연루 혐의가 있던 나이트클럽 경영자 앤토인 존스의 자동차 위치를 영장 없이 추적했다가 수사 방식이 문제가 돼 무죄가 났다.

애국자법은 정부정책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미 정부는 2003년 이라크 침공에 반대한 반전활동가 수전 린다우어에게 외국 스파이를 기소하는 데 쓰이는 조항을 적용하려 했다가 기소를 포기했다.

애국자법이 발동된 후 정보수집에 제동을 거는 장치가 사라지면서 정보기관은 불특정 다수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2005년 11월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FBI는 국가안보레터 수십만건을 발송해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자동차 렌트업체, 물류업체 등에 종업원과 고객 100만명의 정보를 요구했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2013년 폭로한 국가안보국(NSA)의 전 지구적인 개인정보 감시도 애국자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숱한 비판 속에서도 애국자법은 14년이나 유지됐고, 지난해 6월에야 폐기됐다.

<이인숙 기자 sook9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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