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용품' 색안경 여전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요"

정지용기자 김현정 인턴기자 입력 2013. 3. 23. 02:33 수정 2013. 3. 24.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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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관·제조 발목 잡힌 성인용품 "억울해요"

판례 엇갈리고 단속기준 모호 속 관세청 "일단 압류" 단호한 입장디자인·포장 일부만 바뀌어도 통관보류 - 불복소송 쳇바퀴 양상"파렴치범 낙인에 폐업" 하소연… 조잡한 짝퉁 은밀한 유통 폐해도중기·특허청 전향적 변화가 위안

지난 달 25일 오후 3시, 인천국제공항세관 남부 창고. 여성용 자위기구 수입 통관이 보류됐다는 소식이 접수됐다. 관세청은 마약, 총포류 등 위해 물품과 음란물 등의 통관을 보류한다. 관세법 234조는 '헌법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풍속을 해치는 서적, 음반 또는 이에 준하는 물품'의 수출입을 금하고 있다. 관세청 기준으로 자위기구를 비롯한 모든 성인용품은 음란물품이다.

5,509㎡(약(1,600평) 면적에 족히 3층에 달하는 높이. 이 창고는 하루 평균 400여 건, 80톤 가까운 물품이 반입되는, 대한민국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창고 안에는 8,000여 개의 수하물 박스가 쌓여 있었다. 문제의 물품은 라면상자 크기의 박스 두 개. 포장을 뜯고 보니 계란 모양의 아이 주먹만한 플라스틱 제품 71개가 들어 있다. 시가 37만 원어치. "이것도 음란?" 누군가의 푸념 같은 항변에 세관 수입국 이주용(47) 계장은 "자위기구처럼 사회 풍속을 저해할 수 있는 물품은 모양이나 크기와 상관없이 통관 보류가 원칙"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수입업자가 통관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소송을 제기해 승소해야 한다.

"관세청과 벌인 소송만 30여 건"

지난 2007년, 성인용품 수입업체 MS하모니는 여성용 자위기구 10점을 수입했다. 21.5cm 길이 실리콘 재질의 남성 성기 모양 딜도(삽입용)였다. 관세청은 통관을 보류했고, 업체 측은 소송을 걸었다. 1심에서는 승소, 2심에서는 패소. 당시 항소심 법원은 "남성 성기를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묘사해 사회 통념상 보는 것 자체로 성욕을 자극한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다시 항소. 대법원은 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2009년 대법원(주심 신영철 대법관)은 "사회통념상 일반인의 성적 흥분을 유발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해친다고 보기 어렵다"며 "자위용품이라는 이유만으로 통관을 보류하는 것은 국민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관세청 관계자는 "법원의 판단은 특정 자위기구가 풍속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자위기구 일반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새로운 제품은 물론이고 같은 물품이라도 디자인이 조금만 달라져도, 제품 포장만 바뀌어도 통관보류- 소송 등 절차를 반복해야 한다. 문제는 자위기구의 종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소비자의 기호 역시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

다른 수입업체 대표 이재호(가명ㆍ37) 씨는 "그런 식으로 관세청과 벌인 소송만 지금까지 30여 건인데 그나마 나아진 건 건당 2년씩 걸리던 소송이 이제 요령이 생겨 6개월 정도로 단축됐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돈과 시간 등 소송 비용은 물론이고, 컨테이너에 오래 방치되면서 기온 등에 따라 물품이 변질 파손돼 보는 손해도 만만찮다"고 "이건 우리더러 업종을 바꾸거나 밀수를 하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공장 문 닫고 소송 이기면 뭐하나"

수출업체의 푸념도 만만찮다. 코리아토이 이주락(47) 대표는 "2010년 10월 국제 성인용품 3대 박람회 가운데 하나인 독일 베를린 박람회에 참가, 미국과 브라질 독일 시장을 개척했다. 참가비용만 6,700만원 들었다.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통관사고가 터졌다. 물품은 압수당하고 벌금도 2억6,000만원이 나왔다. 소송 걸어서 그 건 해결하는 데 1년 남짓 걸렸고 소송 비용으로 1억 넘게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사받고 그 일 처리하느라 쫓겨 다니면서 납기일을 못 맞춰 신규 계약이 몽땅 파기됐고, 신용도 잃고 거래처도 잃었다. 그는 "외국과의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게 납기 신용이다. 품질은 이미 검증됐기 때문이다. 물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관세청이 잡으니까 수출업자들은 너나없이 불안감을 안고 영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인용품=음란물 등식은 제조단계에서부터 옭죄고 있다. 경북 구미에서 자위용품 업체 '슈퍼이글'을 운영하던 김백원(62)씨의 하소연. "지난 해 6월 음란물 제조ㆍ판매 혐의로 현행범으로 검거됐다. 방송사(MBN)에서 단속 현장을 취재 나와 전국에 영상뉴스까지 나갔다. 석 달 뒤 검찰이 불기소처분을 내렸지만 난 파렴치범으로 주위에 낙인 찍힌 뒤였고, 조사 받는 동안 직원들은 모두 그만뒀다. 당연히 공장도 문을 닫았다."

특정 품목에 한한 것이기는 하지만, 대법원 판례도 남성 자위기구는 불허(2003년), 여성용은 허용(2009년)으로 엇갈리게 나왔다. 검찰도 근년 들어 불기소나 무혐의 처리되는 예가 잦다. 그러다 보니 일선 경찰도 단속에 애를 먹는다. 신고가 접수돼도 판매점이 학교 근처거나 불법 의약품 판매 등 명백한 위법사실이 없는 한 헷갈린다는 것이다. 지난 달 성인용품점 단속을 벌였던 서울 강동경찰서 생활질서계의 한 경찰관은 "음란 판단의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돼야 단속을 해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우리 정품은 세관 창고에, 중국 짝퉁은 버젓이 시장에"

지난 11일 저녁, 경기 안양의 국제유통단지내 한 카페에 성인용품 관련업체 대표 6명이 모였다. 자위기구 수출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보자는 취지의 모임이었다. 그 자리에는 업체 측의 요청에 따라 중소기업청 담당자도 참석했다. 이들의 대화는 금세 관세청 등 관계기관 성토장으로 표변했다.

남성용 자위기구 생산업체인 HEPS 권문식(36)대표는 "우리 제품이 관세청에 발목이 잡혀 있는 사이 중국산 짝퉁이 Heps라는 상표를 달고 지금도 e베이 등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다 마찬가지다. 정부가 수출 판로를 개척해주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발목 잡는 게 말이 되냐"며 포문을 열었다. 유통업을 겸하고 있는 김준수(가명ㆍ45)씨는 "성인용품으로 신고하면 100% 통관 보류 된다. 소송하자면 최소 1년씩 걸리니까 '완구'나 '여성용 마사지기'등으로 편법 수출하는 업체들이 있다. 또 그런 업체만 노려 신고해서 보상금을 타가는 파파라치도 있고, 가끔 경쟁업체에서 슬쩍 신고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언제 적발될지 몰라 다들 조마조마해 한다. 운이 나쁘면 가는 거다. 그들이 모두 편법을 쓰고 싶어서 쓰는 악덕 업주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허청은 최근 자위기구를 '유희용 놀이기구'로 분류, 디자인 등록증을 내줬다. 디자인이 크게 혐오스럽지 않다면 문제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기능이나 작동법 등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심사 대상이 안 된다. 분류코드도 없다. 다만 전동자위기구인 바이브레이터는 마사지용품으로, 성행위시 쓰는 윤활제인 러브젤은 화장품으로, 콘돔은 의약품으로 분류해서 제한적으로 특허를 내주기는 한다.

KB케미컬의 배성열(45) 대표는 "법원이 달라지고 특허청이 제한적이나마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보다 훨씬 앞서 달라졌고, 자위용품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권력기관도 그 변화를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임이 끝나도록 중소기업청 담당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세계 성인용품 시장은 업계 추산으로 연간 최소 100억 달러 규모. 중국이 그 시장의 1/5(약 20억 달러)을 점유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음성적으로 이뤄지는 제조 유통 수출입 이 많아 추산 자체가 어렵지만 경찰과 업계는 내수시장 규모가 대략 연 1,000억원 대에 이를 것으로 본다. 성인용품점(온라인업체 제외)은 전국에 약 3,000여 곳이 성업 중이고, 소매점에 물품을 공급하는 총판만도 30여 곳에 달한다. 제조업체는 10곳 남짓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김현정 인턴기자(서울여대 영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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