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모임 회비? 나중에 다들 후회합니다

2011. 4. 3. 13:5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박미정 기자]

유영미(42세·가명·기혼)씨는 소위 '맏며느리'다. 남편이 2남 2녀 중 장남이라 그런지 시댁 가족들이 모일 때면 알게 모르게 계획되지 않은 지출이 많은 편이다. 시부모님 생신이나 어버이날 등 매년 반복되는 기념일마다 번번이 동서와 시누이들에게 어떻게 할지를 의논하고 돈을 걷고 하는 것도 번거롭게 여겨지던 터에 다달이 '가족회비'를 걷자고 제안했었다.

"뭐 어쩌다 모여 외식이라도 하게 되면 으레 큰 형네에서 내야 하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곤 해요. 각자 분담해서 내자고 하기도 뭔가 꺼림칙하고…. 그렇다고 매번 우리가 내는 것도 하루이틀이죠. 지난 1년 동안 이런저런 명목으로 시댁에 쓰인 돈을 합산해보니 300만 원이 넘더라고요. 시댁에 쓰이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아이들도 커가는데 계속 이렇게 쓸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몇 년 전 추석에 다 모인 자리에서 가족회비를 걷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어요. 매달 자동이체로 적은 금액을 꾸준히 모아두면 십시일반으로 부담도 적어지고, 모인 목돈으로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도 좋을 것 같아서요."

우연히 친구 사정 얘길 듣고는 가족회비를 미리 준비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던 친구는 시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시고 나서 중풍까지 겹치셔서 매달 병원 요양비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고 했다. 미리미리 준비해두지 못해서 살던 집 내놓고 다시 전세로까지 이사했단 얘기에 영미씨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회비를 모아 놓고 돈 쓸 궁리만 하게 되는 심리란?

덕분에 3여 년간 유영미씨가 만든 별도의 계좌로 가족회비가 자동이체되어 들어오고 있다. 음식 재료나 과일 등을 각자 준비해 와서 집에서 조촐히 치렀던 시부모님 생신도 '가족회비'가 모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외식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유영미씨도 음식 준비 안 해도 되고 무엇보다 먹고 난 후 번거로운 뒤처리를 안 해도 되는 편리함에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패밀리 레스토랑은 기본이고, 어디 초밥 뷔페가 맛있다, 어느 호텔 식당에 가 보고 싶다 하며 지출 규모는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가족 회비의 '마중물 효과'

"이뿐만이 아니에요. 아예 인터넷으로 유명 맛집을 검색해서 메일로 보내놓고 다음번엔 여기 어떠냐고 해요. 가까이 사는 동서는 정기적인 행사 외에도 틈만 나면 가족끼리 외식하자고 전화하고요. 특별한 일 때문이 아닌 일상적인 부모님 방문 때도 회비로 외식을 하자고 자꾸 조르는 통에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시누이들도 어버이날 선물을 갈수록 비싼 거 하자고 해서 고민돼요. 지난번에는 둘째 시누이가 회비 얼마 정도 있느냐고 물어보더니 좀 더 보태서 두 분 일본 온천여행 보내드리자고 하더라고요."

4남매 각자 사는 가정 형편이 그렇게 넉넉한 것도 아닌데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에 대한 다른 대비를 전혀 못 하고 있는 상황이 불안해서 시작된 가족회비였다. 행여 급한 일 생기거나 아파서 병원에라도 가시게 되면 갑자기 목돈 내놓을 형편들이 못되니까, 그럴 때 쓰자는 취지로 모으려 했던 거였다. 그런데도 너무 과도하게 기분 내는 데 써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만류를 해보았지만 '자기 돈도 아니면서 왜 생색내느냐'는 분위기다. 다들 어떻게 하면 모인 돈을 쓸까만 궁리하는 사람들 같았다.

"어차피 부모님을 위해 정말 급할 때 나중에 쓰자고 모으는 돈이잖아요. 그냥 예전 하던 대로 조촐하게 하면서 조금씩 돈 모아 아프실 때를 대비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해도, 우리 부부가 돈을 너무 안 쓰려고 안달한대요.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매월 5만 원 모아봤자 얼마나 모으겠느냐면서 우선 넉넉하게 쓰자는데 뭐라 할 말이 없더라고요."

물론 부모님께 맛난 음식 사 드리고, 좋은 곳 여행 보내드리는 일도 중요하다. 모이는 돈으로 규모 있게 적당한 시기를 잡아서 어쩌다 한번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어디까지가 적정 규모일까. 모이는 대로 쓰기 바쁘고 게다가 '마중물 효과'처럼 회비 때문에 오히려 더 갹출해서 돈 쓸 일이 많아지니 요즘은 이놈의 '가족회비'가 고민이다.

"그까짓 5만 원이라뇨. 다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얘기하죠? 피차 뻔한 소득과 살림살이에서 막 써도 되는 돈이 한 푼이라도 있나요? 5만 원이면요, 첫째 아이 학습지 한 달 교육비를 내고도 남는 금액이고요,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온 가족 영화 관람비이기도 해요. 그런 돈을 온전히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고급 식당에 갖다 바치는 게 그게 누구를 위한 건가요. 부모님께 드리는 효도는 맞나요? 게다가 각 가정에서나 5만 원이지 모이면 20만 원이에요. 만약 가족회비가 아니라 그냥 내게 들어오는 20만 원이라도 그렇게 써버리자고 할 수 있을까요?"

회비 냈으니 푸짐하게 먹자?

민주영(46세·가명·가정주부)씨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꼭 나가는 모임이 있다. 함께 책 읽고 토론도 하고, 자녀교육이나 살림 정보도 나누고, 때론 개인적인 고민 상담까지 나누면서 주부로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일상에 다시금 활기를 주고 재충전하게 해주는 소중한 모임이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모임을 진행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저녁에 간단하게 술자리를 갖기도 한다.

처음에는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밥이나 차를 사는 형식으로 모임이 진행됐다. 하지만 그날의 메뉴에 따라 개인별 지출 편차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그냥 회비를 걷어 비용을 내자고 결정했다. 모임 초반에는 1만 원이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기 충분했다. 하지만 모임이 진행될수록 걷는 회비가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했다.

"회비를 걷으면서 밥을 먹을 때나 차를 마실 때도 조금 더 비싸고 맛있는 메뉴를 시키게 되더라고요. 내가 내는 돈은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쓰는 건데 나만 싼 거 먹으며 돈 아낄 필요는 없잖아요."

어느 날 술자리 모임에서 문득 주영씨는 안주를 이것저것 시키는 회원 한 사람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다.

"술도 잘 못 마시는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안주를 네 접시나 시키는 거예요. 오기 전에 다 같이 밥도 먹은 터라 배가 고픈 상태도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자긴 술 못마신다면서 값비싼 칵테일을 시키더라고요. 가볍게 호프 한잔하자고 들어온 건데 참…."

헤어질 때 즈음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여기저기 남은 안주들을 보면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처음 1만 원 남짓이면 충분했던 회비가 이제는 3만 원 가까이 된 이유를 직접 서서 눈으로 보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돈 아까우니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주영씨에게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던 이 모임이 1년이 다 되어 가면서 왠지 모르게 조금씩 염증이 나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이유 중 매주 3만 원이라는 회비가 점점 부담스러워진 것도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십시일반 하면 더 잘 쓸 수 있는데...

특정한 공동의 목적을 십시일반 도와 달성하는 각종 '회비'는 매우 훌륭한 상부상조 시스템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금을 내는 것도 같은 의미 아닐까. 한 나라 살림을 위해 많이 벌면 많이 버는 만큼, 적게 벌면 적게 버는 만큼 돈을 모으고 또 집행하는 그런 시스템이리라. 그런데 모이는 돈은 '좋은 취지'만으로는 상당히 많은 문제를 드러내곤 한다. 마치 주주가 자기 권리를 행세하듯 십시일반 돈을 낸 사람은 작든 크든 자신의 기여분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려 들 것이다. '좋은 취지'에 대한 생각도 '동상이몽' 격이라 각자 원하는 바도 다르게 마련이다. 이를 도맡아 관리하는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소소한 의견'들을 조정해야 하고 괜한 분쟁에 휘말리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돈을 모아서 쓰는 일에는 작건 크건 그 모으는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한다. '가족외식회비'가 아니라 '부모님 응급상황 대비용'이라고 명목을 정확히 해야 모인 돈에 대한 동상이몽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어떤 사안, 예를 들어 '부모님 여행 보내드리기' 같은 곳에 목적과는 다른 돈 집행을 하게 되었을 때는 '예산' 규모를 정확히 하고 그 예산에 맞는 곳에 보내드리는 식으로 쓰는 금액의 한도를 정해야 한다. 이런 과정의 의사결정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회비는 소소한 분쟁의 원인이 될 뿐이다.

이성주(35세·가명·기혼)씨 가족은 가족회비를 걷는 몇 가지 룰이 있다. 첫째, '부모님'에 관계된 일상적 지출은 회비에서 지출 후 가족들에게 월별 결산을 하여 공지한다. 둘째, 가족회비를 걷어 운영하는 사람은 현재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형제로 하고, 회비를 50% 할인해 준다. 고로 부양자의 기본적인 노고를 회비에도 반영한 셈이다. 셋째, 2000만 원이 모일 때까지 다른 용도로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2000만 원을 넘겨 모은 돈으로 부모님 울릉도 여행을 보내드렸다.

"당연히 저희도 처음에 이래저래 잡음이 많았죠. 저런 원칙들은 운영하면서 그러한 잡음들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가족들이 모여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게 어디 익숙한가요. 시행착오도 많고 자잘한 싸움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지금은 오히려 가족 일을 의논해서 더불어 처리할 수 있게 되어 좋습니다. 장남이라서, 딸이라서, 막내라서…. 여러 이유로 의무가 되기도 하고 핑계가 되기도 하는 것들이 결코 가족의 화합에 도움을 주진 않잖아요. 아들이든 시집간 딸이든 더불어 기여하고 참여해서 의견도 내고 하면서, 뒷말을 줄이고 공공의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결정하는 습관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모아서 쓰는 과정은 어떤 모임의 공동의 가치를 달성하고 서로 간의 의사결정과정을 학습하는 하나의 좋은 틀이 되는 셈이다.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관계 맺고 사는 일에 한없이 서툰 우리들이라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살게 된다. 그렇다고 공동체적 삶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름의 기여도 하고 의견을 개진하고 조율하는 등의 과정을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한 하나의 소중한 학습 도구로서 '회비'를 잘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하다.

* 클릭 한 번으로 당신도 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2011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