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한국일보' 받아들고,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입력 2013. 6. 20. 08:37 수정 2013. 6. 2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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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현장] 채지은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미디어오늘 채지은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지난 여름, 나는 사상 유례없는 언론사 연쇄 파업 현장을 취재하느라 뛰어다녔다. KBS, MBC, YTN, 국민일보, 연합뉴스의 기자, PD, 기타 제작 관계자들이 편집권을 장악하고 왜곡 보도를 일삼은 사장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모두 타당한 싸움이었으나 파렴치한 월급사장 하나 날리지 못하고 패배로 끝났고, 이들은 분루(憤淚)를 삼키며 회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 후, 사주의 전횡에 맞선 한국일보 기자들이 다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노동조합이 4월 29일 장재구 한국일보 회장을 200억원의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이후 장회장은 안팎으로 자신을 비호할 방패막이 인사들로 편집국장과 부장단 인사를 단행했다.

지난해 경영실적 악화라는 이치에 맞지 않는 핑계로 이충재 편집국장을 기습 경질한 데 이어 또 한번 사주의 입맛대로 이영성 편집국장이라는 편집국의 구심점을 드러내면서 사측과의 갈등은 화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기자들은 파업이나 제작거부만은 안 된다고 결의했고, 신문을 지키면서 싸우기로 했다.

사측에서 신임 국장으로 세운 하종오 사회부장을 임명동의 절차에 따라 98.8%(투표율 86.5%)의 압도적 반대로 부결시켰다. 한국일보 역사상 편집국장 내정자가 절차를 통과 하지 못한 건 처음 있는 일로 그만큼 부적절한 인사였다는 반증이다.

지난달 21일 오후, 인사위원회에 참석하려던 장재구 한국일보 회장을 정상원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비대위 기자들이 가로막고 있다.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런데 15일 휴무인 토요일 오후 장회장은 용역과 자신이 임명한 부장단을 대동하고는 기습적으로 편집국을 봉쇄했다. 이영성 편집국장을 멋대로 해고한 데 이어, 그동안 신문제작을 지휘하던 황상진 부국장 등 4명에 대해 대기발령이라는 초강수로를 둬 불을 지른 것도 모자라 16일 하종오 사회부장을 편집국장 직무대행으로 재임명했다.

기자들에게는 신문 제작을 위한 기사 작성 프로그램인 사내 기사집배신과 메일 접속도 막은 채 '근로제공 확약서'라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회장이 임명한 데스크들의 지휘에 따라 일하겠다는 괴문서에 사인을 해야 편집국에 들여보내주겠다고 통보했다. 상황이 어떻든 한국일보라는 제호의 가치는 훼손하지 말자며 신문만은 지키자고 결의했던 기자들은 하루아침에 편집국에서 쫓겨났다.

한국일보는 1991년 노사 합의의 편집강령에서 '언론의 자주성과 독립성이 확립돼야 국민의 알권리가 보장된다고 확신하면서 이를 저해하는 어떠한 내외적 간섭을 철저히 배격할 것을 천명했다. 사주뿐 아니라 권력과 자본 등 외압에서 자유로운 언론을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용역 깡패를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한 일련의 한국일보 사태는 한국 언론역사상 초유의 사태라는 오점을 남겼다.

1954년 6월 9일자 창간 사설의 제목 '신문은 아무도 이용할 수 없다'는 고(故) 백상 장기영 사주의 뜻에 따라 편집권 독립만은 금과옥조로 여겨왔던, 때문에 족벌언론임에도 불구하고 사주의 입김을 거의 받지 않았던 한국일보의 아름다운 전통도 허망하게 무너졌다.

지난해 언론사 연쇄 투쟁은 월급사장 한명도 날리지 못한 채 끝이 났다. 그런데 한국일보는 59년간 종합일간지를 소유해 온 장씨 일가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을. 그러나 깨질지언정 더 이상은 59년 역사의 한국일보 제호에 먹칠하는 장회장과 함께 할 수 없다는 한국일보 구성원들의 의지는 굳건하다.

나는 2003년 6월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회사는 입사하자마자 6개월의 견습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10%의 임금을 유보하고 상황이 나아지면 지급하겠다고 했고, 몇 년간 삭감된 연봉 그대로 동결됐다. 그 약속은 몇 년째 지켜지지 않았지만, '돈 많이 벌자고 기자 됐냐'며 서로 겸연쩍어할 뿐 회사에 항의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게 바보 같은 한국일보 기자들이다.

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 조합원 백여명은 지난 17일 오후, 서울경제·코리아타임즈 등이 입주해 있는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임광빌딩 13층 서울경제 편집국 앞에서 '짝퉁 한국일보' 발행을 돕는 일부 서울경제 간부들을 규탄했다.이치열 기자 truth710@

기자협의회에서 노동조합으로 다시 체제를 정비한 후 임금은 약간씩 올랐지만 취재비, 야근비, 휴일근무 수당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지만 감내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한국일보의 상징과도 같던 사옥에서 쫓겨나고 외부 필자들의 원고료가 밀리고, 협찬을 받아 주최하는 행사들의 상금과 심사비 등이 석연찮은 이유로 지급되지 않는 등 회사 경영상태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그제서야 우리는 제 밥그릇을 못 챙긴 것뿐 아니라 사주의 비리와 전횡으로 한국일보가 무너지는 걸 방관하는 더 큰 우를 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10년 넘게 묻어뒀던 회장의 비리나 경영 파탄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뒤늦게 노조가 문제삼고 나선 것은 한국일보 전체가 침몰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17일자 한국일보, 회장의 편에 선 하종오 사회부장 등 9명의 데스크급 기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대여섯명의 일선기자가 만든 '짝퉁 한국일보'를 받아들고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비리 사주와의 싸움에서도 치졸한 보복인사와 일련의 사태에도 신문만은 제대로 만들고자 결의하고 편집국을 사수했던 기자들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기존 32면에서 8면이 줄어든 24면이 줄어든 데다 연합뉴스와 자매지 기사를 그대로 가져다 마구잡이로 뒤섞은 최소한의 기본도 갖추지 않은 파행에 경악했다. 바이라인 조차 없는 기사가 22건이나 됐다. 후배들은 신문을 받아보고 치를 떨었고 분해서 눈물을 흘렸다.

한국일보는 익명으로 처리한 관계자 멘트 하나까지도 데스크가 누군지 꼬치꼬치 물어 확인하는 전통이 살아있는 신문이었다. 그런데 신문윤리강령 실천요강 제8조(출판물의 전재와 인용)에도 위배되는 표절로 먹칠을 했다.

역사에 남을 신문이라며 소장해야겠다는 사람들의 비아냥이 들리지 않는가. 사측은 "이번 조치는 그동안 편집·발행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만들던 파행을 바로잡은 것"이라며 "신문 발행도 100%는 아니지만 정상 수준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이게 정상화인가. 사주를 비호하기 위해 진실마저 왜곡하는 회장 비호 기자들이야말로 정상이 아니다.

지금 한국일보 기자들의 희망은 딱 하나다. 다시 한국일보를 정상 발행하도록 편집국에 출근하고 회장이 법의 절차에 따라 처벌을 받고 한국일보를 그만 떠나주는 것. 그래야만 나 또한 '사안을 공정하게 보고 명확한 기사를 작성했는가' 매일 자괴감에 시달리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현재 정상적인 신문을 만들기 위한 출근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18일 로 편집국 폐쇄는 나흘째를 맞았다. 농성 2,000일을 넘긴 재능교육 노동자들이나 목숨을 건 고공농성으로 호소하고서야 여론의 주목을 받은 숱한 사업장에 비해 이번 한국일보 사태는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특혜를 받고 있다. 문화부장관과 법무부장관, 국회의원 등 정치권에서도 우려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 특혜는 기자들에게 사회 곳곳을 살펴 보도하는 기자 본연의 임무를 완성하라는 독자들의 지지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채지은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다시 한번 간곡히 독자들과 언론 동지들에게 호소한다. 사주의 언론 사유화와 편집권 침해는 어디에서 벌어진 일이라 해도 막아야 한다. 한국일보 사태의 본질은 이념의 문제나 노사 갈등이 아니다. 사주에 의해 자행된 편집국 폐쇄를 바로잡고자 하는 기자들의 정당한 싸움이다.

비록 한국일보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신문은 아니지만, 이념이나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기록하라는 자'라는 기자(記者)의 직분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지켜온 59년 전통의 중도지다. 또다시 같은 일이 다른 언론사에서 반복될 수 있기에, '언론의 독립'이라는 무너져 가는 가치를 지키고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한국일보를 지켜달라고 부탁드린다.

나는 지난해 투쟁에 나섰던 모든 언론사들을 지켜보며 보도한 기자였다. 때문에 현재 한국일보 투쟁에 대해 좀 더 냉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졌다. 그렇지만 과연 지난해 투쟁에 나선 언론사들은 모두 성과가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졌지만 지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언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분연히 나선 언론노동자들의 모습은 굴종하는 게 아니라 저항하는 언론의 모습을 역사에 남겼다.

한국일보만은 승리해서 언론을 사유화하려는 세력들에게 교훈을 주는 역사로 남길 바라지만, 지더라도 비굴하지는 않을 것이다.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저항하는 게 지금 한국일보 기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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